내 고향의 지명은 ‘경둔리(敬屯里)’이다. 행정상 지명이 그렇고 흔히 ‘둔터골’이라 부른다. ‘둔터골’이란 ‘백제군이 주둔했던 터’를 뜻한다. 지형마다 백제와 관련된 고유지명들이 많다. 말을 방목했다는 *1)‘양마장(養馬場)’, 사기를 구워낸 *2)‘사기점골(砂器店-)’, 옹기를 구워낸 ‘옹기점골(甕器店-)’, 장군의 말이 추락사 한 *3)‘마총봉(馬塚峯)’, 군옥(軍屋)의 터로 추정되는 *4)‘돈대위(墩臺-)’, 금강 줄기가 한 눈에 보이는 ‘십리바위’ 등…. 광복군의 무기를 만들었다는 *5)대장간 터에선 요즘도 철제 불순물이 나온다. 토색(土色)이 거무튀튀하다.
마을의 가장 높은 지형을 ‘용난골’이라 부르는데 산세가 험해 인적이 미치지 않는다. 한때는 군(軍) 기피자들이 토굴을 파고 은신했던 곳이기도 하다. 기피자들은 몇 달씩 토굴에 머물며 야음을 틈탄 기도비닉으로 마을을 다녀갈 뿐이었다. 어떤 이는 저녁 무렵 관(官)의 감시가 취약할 때에 마을로 내려와 소꼴을 베다가 불시 출동한 공무원에게 불알을 차이는 바람에 크게 앓기도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때나 지금이나 ‘용난골’은 인적과는 거리가 멀다.
1970년 전후로 마을에 대대적인 공사가 있었다. 상수도 공사였다. 마을 꼭대기 집부터 맨 아랫집 종대네 집까지 땅을 파고 관(管)을 묻는 공사에 온 마을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남녀노소가 없었다. 저수탱크는 바로 아까 그 ‘용난골’이었다. 거대한 지하 탱크에 계곡의 물을 끌어 저장했다가 각 가정으로 내려 보내는 방식이었다. 거기서부터 종대네 집까지는 2킬로가 넘는 거리였다. 수도관은 2킬로 넘는 거리를 내려오면서 사기점골 문복이네를 비롯하여 개울 건너 창순네와 재식이네 집까지 가지를 뻗었다. 한 집도 빼놓지 않았다. 순전히 인력으로 곡괭이 삽 같은 농기구에만 의존하는 재래식 공사였다. 깊이 1미터 가량 땅을 파고 매설하는 송수관 공사는 대역사로 평가되기 충분했다. 암석지대와 산언덕, 논바닥, 밭두렁, 정자나무 밑…. ‘사기점골’ 경자네 집 모퉁이를 돌아 내려올 땐 낭떠러지에 붙어 파야 할 정도로 난공사였다. 그렇게 하여 마침내 준공식이 열렸을 때 마을사람들은 ‘중뜸’ 경옥이네 바깥마당에 모여 풍악을 울렸다.
상수도가 생기고 마을은 일대 변혁을 맞았다. 우선 빨래터가 사라졌다. 마을의 공동우물이 뚜껑으로 밀폐되고, 이제 사람들은 각 가정에서 물을 받아 쓰면 됐다. 물지게를 지고 다니던 풍경도 사라졌다. ‘용난골’ 꼭대기서 내리 뻗는 물줄기는 엄청난 수압이어서 여름 날 수도꼭지를 틀고 그 밑에 엎드리면 등짝이 아플 지경이었다. 가끔 가재 앞다리도 튀어나오는 ‘둔터골’ 상수도였다.
상수도에 얽힌 에피소드도 많다. 저수탱크로 사람이 접근해선 안 되었고 입구는 철사 줄로 봉쇄되었다. 가끔 이장이 소독약을 타러 오르내릴 뿐이었다. 어차피 인적이 미치지 않는 ‘용난골’이었지만 가축의 접근 같은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긴 저수지 하나에도 수문장이 있어 그 사람의 자물통이 열리지 않으면 논에 물도 못 댈 정도였으니….
상수도 물은 지하에서 끌어올리는 게 아니므로 여름엔 미적지근했고 겨울엔 아주 차가웠다. 그래 겨울철 동파사고가 심심찮게 일어났다. 물이 한 번 터지면 인근이 온통 빙판이었다. 앞서 말한 대로 수압이 파괴적이어서 동파된 땅 속으로부터 분수 같은 물줄기가 솟구쳤다. 더러 이웃의 경계가 가파른 집끼리 다투는 예도 있었다. 아랫집에서 물을 틀어놓고 외출하면 윗집 수돗물이 예전만 못해 갑작이 다량의 물이 요구될 때 불만으로 이어졌다. 아랫집 가서 수도꼭지를 잠그면 그만이었지만 그것도 여러 번이면 폭발하기 마련인 것이다.
이장의 권고 방송도 빠지지 않았다. “여러분 가정의 수돗물은 먹는 물입니다. 하루 내 마냥 틀어놓는 물이 아닙니다. 에, 그러고요. 동파사고 나지 않도록 좀 유의 바랍니다. 중간에 물이 터지면 여러 사람 애 먹습니다. 언 땅에 곡괭이가 먹히는 줄 아세요? 이장 업무에 염려가 많이 됩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수도를 점검하시고 안 쓰는 이불이나 가마니 같은 걸로 잘 덮어 쓰실 것을 권고 드립니다. 어느 집을 보면 개집에는 솜이불 깔아주고 수도꼭지는 얼어터지든 불어터지든 개의 않겠다는 식인데, 그러지 마시고, 이 순간부터는 각별히 유념허셔서 부락이 평온혀질 수 있도록 협조혀 주시면 대단히 감사허겄습니다.”
상수도가 준공되고도 5년이 더 흘러서야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다. 당시 환경에 수돗물이 공급되는 마을이 극히 드물었으리라. 도시 사람들이 믿을지 모르지만 나 어렸을 적만 해도 부모에게 불효한 사람을 동네 좌상어른 댁 바깥마당에 불러다 놓고 볼기를 쳤다. 야음에 면소재지로 나가 도박을 한 게 발각되어 외지로 쫓겨난 사람도 있다. 주막도 상점도 없다. 지금까지도 없다. 성냥으로 불붙이던 시절에 성냥개비가 동 나 산 너머 마을까지 십 리를 걸어갔다 온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어른들 담배가 떨어져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바늘과 실, 가위, 성냥이나 담배 같은 건 빌려다 쓰는 물건이 아니라고 들었다.
상수도가 생긴 지 38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 물을 마시는 집이 있다. 특별히 하자 될 게 없고 수도꼭지만 온전하면 동해물 마를 때까지 마실 수 있는 물이다. 전기도 필요 없는 상수도다. ‘용난골’ 상수도에 의한 변화는 마을을 살찌우고 삶의 질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러니까 ‘둔터골’이 지금도 나날이 발전하며 주민 모두가 평온을 누리고 사는 것이다.
*1) 양마장(養馬場) : ‘병목안’ 기청이네 집 뒤 거마(車馬)의 진입이 가능한 산길을 올라 ‘감나무골’로 넘어가는 능선 일대 지명으로 마을 초입에서는 보이지 않음. *2) 사기점골(砂器店-) : 과거 경자네 집 옆 산 위로 뻗은 소로를 50-60m가량 오른 지점으로 붉은 흙 속에 그릇 깨진 파편이 수 없이 묻혀 있다. ‘곱돌’이라 불렀던 조각들은 부드러운 길바닥에 글을 써도 백묵처럼 선명했다. *3) 마총봉(馬塚峯) : ‘가재고개’ 정상에서 능선 소로를 타고 ‘조령리’ 방향으로 1.5km 가량 오르면 급경사 커브가 나온다. 이곳에서 백제광복군 장수의 말이 발을 헛디뎌 죽었으며 마총(馬塚)은 바로 위쪽 양지에 있다. 사람 것보다 묘역이 넓고 봉분이 웅대하다. *4) 돈대(墩臺) : 평지보다 조금 높은 언덕. ‘욕골’ 병천네 집 뒤 언덕 밭으로 ‘절골’로 통하는 소로가 있고, 바로 위쪽 평편한 정상에 부여 쪽을 정찰하던 군옥(軍屋)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5) ‘병목안’ 협우 형님네 사랑채 코너를 돌아 기영이네 집으로 가다 보면 ‘용난골’에서 내려오는 개울을 건너야 한다. 이 개울을 지나자마자 오른쪽 길가 노령의 호두나무 아래 밭이 백제 광복군의 무기를 만들던 대장간 터이다. 밭 가장자리 개울가 흙 속에서 숯검정과 철제 부스러기가 나온다. 여름철 큰 비로 개울물이 한바탕 휩쓴 뒤에 보면 정확히 알 수 있음. 저수지서 멱 감고 친구들이랑 호두 주우러 가서 몇 번이나 경험했다. 그곳이 백제광복군의 무기제조창 터란 사실은 초등학생 때 인근 류대희(柳大熙) 어르신 댁 글방에 다니면서 여러 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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