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Pen 혹은 文學

끝없는 만년필 사랑

펜과잉크 2012. 7. 30. 16:34

 

 

 

 

 

 

 

 

80년대 초, 라이오넬 리치 & 다이아나 로스의 <Endless Love>, 그리고 브룩 실즈의 관계는 아주 특별했다. <Endless Love>의 주연을 맡았던 당시 16세의 브룩 실즈, <Endless Love>의 사운드트랙을 맡았던 라이오넬 리치, 주제가를 함께 부른 R&B... soul, Disco 음악의 여왕이라는 칭호까지 붙여졌던 다이아나 로스... 80년 <LA BOUM>의 소피 마르소, 81년 <Endless Love>의 브룩 실즈, 82년 <Paradise>의 피비 케이츠는 책받침의 모델로도 나와 수많은 남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기에 충분했다. 개인적으로 라이오넬 리치는 군생활을 하면서도 익숙한 인물이다. 나는 외출을 나와 꼭 레코드점에서 팝과 샹송 테잎을 사곤 했는데 82-84년에 이르는 유명한 가수 중 라이오넬 리치를 빼놓을 수 없다. 아이렌 카라, F.R.데이비드, 올리비아 뉴튼존, 아바, 징기스칸, 케니 로저스, 달리 파튼, 마이클 잭슨... 훈련지에선 휴식시간마다 휴대용 카세트 전축을 틀어놓고 들었다. 건전지는 통신용 P-77무전기의 충전용 밧데리를 대용했다. P-77무전기의 밧데리가 12볼트였으나 무전기용으로 전용하기 힘들 정도로 소모되었다해도 카세트에 연결하면 며칠은 무난히 들을 수 있었다. P-77무전기 밧데리는 충전용이라 부대에 복귀하는대로 반납해야했기에 임의로 폐기할 수가 없었다.

 

만년필 얘기를 꺼내면서 서두에 라이오넬 리치의 <Endless Love>를 올린 것은 만년필에 관한 한 그만큼 각별하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오래 전부터 만년필에 관심을 갖다보니 만년필에 관련된 적지 않은 인물들을 알고 있다. 남대문 도깨비시장의 만년필 수리공부터 -사실 그는 수리공이라고 하기엔 판매상에 가깝다- 강남 유로통상의 A/S 기사까지 두루 안다. 유로통상은 독일제 Montblanc 제품들을 수입해오는 무역업체로서 국내 유명 매장의 Montblanc 제품들을 독점하고있다 해도 과언 아니다. 자연히 A/S 문제를 유념하게 되었는데 그런 이유로 A/S 기사를 따로 고용해 운용하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유로통상의 A/S 기사는 스위스에 유학을 다녀온 전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만년필뿐만 아니라 시계 수리에도 전문가였다. 즉 Montblanc 만년필만 수리하는 게 아니라 시계같은 제품도 수리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유로통상의 Montblanc 만년필은 절대 바겐세일이 없다. 이 점을 거듭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더 이상 Montblanc 제품을 유로통상만을 통해서 구입할 수 있는 게 아닌 현실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서울역전 숭례문 수입상가 문구점에 가면 Montblanc 만년필 정도는 국내 유명 백화점 매장가보다 30% 가량 저렴한 가격에 구입 가능하다. 그뿐인가? 굳이 신제품이 아니라도 괜찮다면 근처의 도깨비시장 중고 매장 같은 데에선 훨씬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인천에도 만년필 노인이 계시다. 칠순을 훨씬 넘은 인상이지만 만년필에 대해서만큼은 인근에 대적할 만한 이가 드물다. 나는 그 분을 통해서도 오래된 만년필을 다수 소장할 수 있었다. 재작년인가부터 사모님이 중병으로 인천시립병원에 입원해 계셔 밤이면 병동에서 잠을 청하는 사연을 알고 더욱 각별한 마음이 생겼다. 사람들은 노인을 '나까마'라 부른다. 젊은 시절부터 만년필과 시계를 취급하셨단다. 오래 전의 내막까지 알고 싶진 않다. 아무튼 그 분을 통해서 좋은 만년필을 다수 얻었는데 며칠 전에도 희귀한 만년필을 한 자루 입수했다. 공용차를 운전하고 우연히 그 분 동네를 지나는 길에 안부 인사차 전화드렸더니 마침 댁에 계시다는 것이다. 그래 만년필이 있으면 뵙고 싶다 했더니 채 2분도 안되어 도로변으로 나오셨다. 그 분이 제시한 두 자루의 만년필 중 눈에 띄는 게 있었으니 다름 아닌 EVERSHARP 만년필이었다. 대번에 오래 전에 생산된 만년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노인이 제시하는 금액에 흥정을 걸어 조금 싼 가격에 만년필을 건네받았다. 집에 오자마자 ebay 사이트를 열었다. 검색한 바와 같이 자료가 떴다.

 

Eversharp SKYLINE Gold & Brown USA lever filling pen 1940's

 

 

이번엔 잉크를 넣어 시필해볼 필요가 있었다. 만년필은 제 아무리 희귀품이라 해도 펜촉(nib)이 살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입한 잉크는 파커 블루블랙이다. 아래 사진은 잉크를 넣어 시필한 걸 찍었다. 잉크 흐름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헛발질이나 불규칙한 흐름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절로 탄성이 터졌다. 1940년대에 나온 만년필 상태가 이 정도라는 게 신기하고 놀라웠다.

 

 

 

 

 

 

 

현재 근무하는 동구 지역엔 금창동 문구점 거리가 있다. 이 거리 문구점에서도 오래된 만년필 한 자루를 얻었다. 얻었다는 얘기는 돈을 주고 구입했다는 뜻이다. 다만 지금은 매기가 끊기다시피했기에 흥정을 통해 양쪽이 흡족할 정도에서 거래를 한다. 아래 사진은 금창동 문구점에서 구입한 오래된 국산 PILOT 만년필이다. 문구점 몇 군데를 들리는 과정에서 공원 옆의 조그만 문구점에 들렀더니 주인아저씨가 대뜸 알아보시며 악수를 청한다. 그 지역을 떠난지 10년이 흘렀으니 나를 알아주신다는 점이 고마울 따름이다. 만년필은 그 옆의 노부부가 운영하는 문방구에서 구입했다. 처음엔 겉에 불순물이 묻어 있었으나 사무실로 가져와 깨끗이 세척했다. 역시 파커 블루블랙 잉크를 주입해 썼다. 복숭아 나무가 있는 사진을 올린 이유는 글을 쓴 게 바로 저 복숭아나무 아래였던 때문이다.

 

 

오래 전에 단종된 국산 빠이롯트 만년필

 

 

 

 

 

그동안 만년필을 모으면서 시내 문구점은 거의 들린 것 같다. 다만 연수동이나 송도처럼 형성된지 얼마 안되는 신도시 문구점엔 가지 않았다. 효성동이나 청천동 혹은 부평동의 허름한 골목의 아주 오래된 문구점, 송림동의 문구점과 자유공원 아래 대동문구점 같은 곳에 들러 가능한 옛날 만년필을 찾는다. 요즘 만년필은 을지로 롯데백화점이나 광화문 교보문보장 혹은 인천 구월동의 신세계백화점 같은 데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런 만년필이 아니다. 물론 오래된 제품이라고 전부 좋다고 볼 수는 없다. 반드시 펜촉(nib)이 양호할 것! 펜촉에 이상이 있으면 아무리 좋은 만년필도 무용지물이다. 참고로 간혹 만년필 관련 글을 쓰는 내게 소장한 만년필이 몇 자루쯤 되느냐고 궁금해하는 이들이 있다. 대략 몇 자루쯤 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다만 공개할 기회가 오면 공개할 수도 있다. 사진으로 말이다. 약 7-8년 전 국내 유명 백화점의 이벤트 행사로 만년필 전시회를 기획했다면서 관리자로부터 만년필을 한시적으로 빌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보험을 전제로 한다면 가능하다는 답변을 준 적이 있다. 그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외부로 일체 대여할 수 없는 게 만년필이다. 남들에겐 그저 눈요깃감에 불과할지 몰라도 내겐 한없이 소중한 정신적 자산이다.

 

 

파커 잉크. 단종된 제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