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Pen 혹은 文學

[스크랩] 쉐퍼 발란스 아발로니 (Sheaffer`s Balance Abalone)

펜과잉크 2015. 10. 15. 20:11

 

미국에서 학술 논문과 같은 연구 성과를 평가할 때 SCI(Science Citation Index) 또는 SSCI(Social Science Citation Index)라는 지표를 이용합니다. 그 연구의 내용을 이후의 연구가 얼마나 인용했는가 하는 지표인데 다시 말하면 이후의 연구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느냐가 그 연구의 질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명작 만년필을 꼽을 때에도 비슷한 기준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어떤 만년필이 이후의 만년필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주었는가가 그 만년필이 얼마나 훌륭한 작품인가를 결정하는 하나의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 관점에서 만년필 색깔에 혁명을 일으킨 1921년 파커 듀오폴드, 피스톤 필러를 처음 사용한 1929년 펠리칸 만년필(1930년 약간의 모델 체인지와 함께 100으로 명명), 이후 거의 모든 제조업체로 하여금 베끼기에 허둥대다가 결국 쇠락의 길을 걷게 한 파커 51(1939년 개발, 1941년 출시) 등을 최고의 명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명작선에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최초의 유선형 만년필, 바로 쉐퍼의 발란스입니다.

 

 

1929년에 발란스가 소개된 후 만년필 세계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짐작합니다. 파커와 워터맨이 중진들을 둘러앉힌 테이블에 발란스를 올려 놓고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성격에 따라서는 중진들의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당장 파커는 듀오폴드의 디자인을 스트림라인으로 바꾸고 워터맨의 제품들도 점점 더 유선형을 따르게 됩니다. 그 영향은 유럽에까지 미쳐 펠리칸은 100의 개선된 모델(100N)을 좀 더 유선형에 가깝게 디자인하고 몽블랑 역시 마이스터스튁 라인에 유선형을 적용합니다. 결국 현대 만년필의 제왕이라고 할 수 있는 몽블랑 149와 만년필 황금기를 끝막음하고 현대의 시작을 알린 파커 51은 모두 유선형 또는 어뢰형을 띠고 있게 되었습니다.

 

 발란스는 1929년 처음 출시되어 이후 모델 체인지를 계속하는데 소개하고 있는 펜은 1930년대 중반의 모델로 배럴과 캡을 자개로 장식한 일명 아발로니(Abalone, 전복)입니다. 그러고 보면 쉐퍼는 참 획기적이고 도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최초의 레버 필러, 최초의 라이프타임, 최초의 플라스틱, 최초의 유선형, 최초의 투 칼라 닙, 최초의 줄무늬, 최초의 금속 캡, 그리고 자개로 장식한 만년필도 일본이나 한국, 중국이 아닌 쉐퍼가 처음이었던 것 같으니 말입니다.

 

모델 체인지의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클립입니다. 처음에는 밴드에까지 내려와 닿는 긴 볼 클립이었는데 길이가 점점 짧아지다가 나중에는 볼을 평평하게 바꿉니다.

 

 

볼 클립을 평평한 클립으로 바꾼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쉐퍼가 유선형의 완벽함에 대해 고민한 것도 그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리고 특히 빈티지 펜에 있어서는 평평한 클립보다 볼 클립이 훨씬 더 멋있지만 발란스에서 만큼은 돌출된 볼과 유선형을 좀 더 완성하는 평평한 클립 중 어느 것이 낫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던힐의 AD2000이 클립을 캡에 밀착시키는 장치를 한 것도 그런 고민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겠지요. 또한 볼 클립을 단 149를 연상해보면 역시 쉽지 않은 선택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디자이너로부터 들은 얘기입니다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디자인은 없다고 합니다. 이미 존재하는 것, 특히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새로운 디자인이 나오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 발란스의 클립을 디자인한 디자이너는 아마도 로마군의 칼이나 중세 유럽 기사의 칼에서 영감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펜후드 회원이라면 누구든지 영화를 보면서 소품으로 등장하는 만년필에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미국 대공황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주인공이 현대 만년필을 사용하는 장면이 나오면 감독의 능력을 의심하기도 하고, 시기적으로도 잘 맞고 또 조예가 깊어야 아는 만년필이라도 보게 되면 잘 만든 영화로 느끼기도 합니다. 얼마전 마이클 만 감독(라스트 모히칸, 히트, 콜래트럴, 핸콕 등)의 퍼블릭 에너미에서 발란스로 추정되는 만년필을 보고는 굉장히 반가웠습니다.

 

 

 

 

 

첫 장면에서 발란스의 유선형 배럴과 배럴 중간의 레버가 보입니다.

 

 

두 번째 장면에서는 캡에서 배럴을 "돌려서" 빼는데 캡 밴드와 클립이 약간 보입니다.

 

 

세 번째 장면에서는 30년대 발란스의 투 칼라 닙을 볼 수 있고 배럴의 형태도 좀 더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배럴의 레버를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록 발란스가 제 넘버 원 펜은 아니지만 193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 발란스가 나온 것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펜을 본 것보다 더 반갑더군요.

 

이상입니다.

출처 : 펜후드
글쓴이 : 남자는박력 원글보기
메모 :

'雜記 > Pen 혹은 文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펠리칸 M400 닙 파트  (0) 2014.04.05
오로라 옵티마 골드 블루 996  (0) 2014.04.05
오로라 레드 데몬   (0) 2014.04.05
펠리칸 M101N Lizard EF 닙  (0) 2014.03.24
몽 149 & 펠리칸 Lizard pen   (0) 2014.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