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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기

펜과잉크 2005. 5. 26. 12:29

 

황우석 교수가 어릴 적에 황 교수에 대한 모친의 장래희망이 면서기였다고 합니다. 저는 그 어른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지금도 저희 고향에선 공무원 집안을 최고로 인정해줍니다. 한 집에 공무원이 2-3명이 있는 집이라면 면에서도 알아줍니다.

 

저희들 어릴 적만 해도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이 있으면 면 소재지 사거리에 프랑카드가 걸렸습니다.

-- <慶> 황우석 서울대학교 합격 <祝> --

대략 위와 같은 문구가 적힌 프랑카드가 면 소재지 한복판 사거리에 떠억 내걸렸습니다. 그 프랑카드는 돌풍이 불거나 짐짝 높은 트럭에 걸려 찢어지기 전에는 누가 내리는 법이 없었습니다. 황우석 교수의 고향은 높은 산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 산기슭에 황우석 교수의 고향이 있습니다. 저희집과 1키로 남짓밖엔 안되는 거리입니다.

 

그러나 그분 고향과 제 고향엔 산이 경계합니다. 이 야산을 경계로 정남향 마을이 제 고향이고, 동북쪽 산기슭이 황우석 교수의 고향마을입니다. 제가 '야산'이란 표현을 하면서 동시에 '산기슭'이라고 한 것은 황우석 교수 고향 뒷산이 아주 가파른 데에 있습니다. 골짜기가 2-3군데 갈래져 있는데요. 산세가 가파른지라 골짜기가 아주 깊습니다. '협곡'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네요. 오후 3시가 넘으면 마을에 산그늘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그 마을엔 빈농의 민가들이 많았습니다. 근래 한우를 대규모 사육하는 우사들이 생겨나면서 이런 저런 변화가 일기 시작했지요. 새로 지어진 집들도 몇 채 있습니다. 깊고 가파란 산세는 땔감 위주의 생활환경이 도시 풍토로 바뀌면서 울창한 수림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갈퀴나무로 황량했던 산등성이가 낙엽이 쌓여 거름으로 바뀌면서 엄청난 나무들로 우거졌습니다.

 

옛날에 지게 지고 다니던 길은 동물들이 이용합니다. 노루, 고라니, 오소리, 너구리, 살쾡이(야생고양이), 족제비, 청설모, 다람쥐, 산토끼, 뱀, 꿩, 산까치, 산비둘기, 참새, 맵새가 주름잡고 삽니다.

 

저희 면(面)이 은산면인데요. 면서기 끝발이면 다 통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5일장이 유행하던 시절, 허리품이 자지털까지 보일 정도로 내려간 면서기가 시장통을 돌며 마을 이장과 손 잡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습니다.

"아따, 홍산리 이장님 나오셨유?"

"어이쿠! 박 주사님 아니셔유?"

홍산리 이장은 코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굽었다가 폅니다.

"밥때가 되었으니 어디 가서 식사라도..."

"그려유. 오늘은 홍산리 이장님 덕좀 보는 방향으로 허지유."

"그런디 박 주사님, 지난번 제 인감도장 가져간 것은 아직도 용무중이래유?"

"야~, 홍산리 앞 뚝방 무너진 거 갖고 정부로부터 보상금 타내려구 그러는 거니께유. 다급히 도장 쓰실데 있으먼 말씀허시구 엔간허면 며칠 더 참구 계셔유. 도장 없다구 며칠내 땅 팔릴 일 생기는 것두 아니잖여유?"

"저희 홍산리 뚝방은 무너진 데가 없는디유."

"어허, 이 냥반이... 누가 들으먼 어쩔려구..."

"맞여유. 박 주사님, 말씀이 백번 맞여유."

"가만... 저짝에 형제식당으로 가까유?"

"그려유. 싸게 가시자구유. 시장허시겄네..."

 

홍산리 이장은 꿈뻑을 못하고 면서기 꽁무니를 따라 식당으로 갑니다. 마을 주민들 앞에서 위세를 떠는 이장이 말대답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받느는 면서기 직함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가끔 면서기 노란 잠바 2명이 한 조(組)가 되어 산림계란 직함으로 마을에 나타나면 생솔가지 찍어다 놓은 집에선 난리 법썩이 납니다. 허청에 꼭꼭 숨기고 짚단으로 겉을 막아 쌓아 위장하기도 했지요. 그런 집에 나타난 산림계 면서기가 작대기로 짚단을 푹푹 쑤셔 가면서 단속하던 모습을 기억하실 분이 계시리라 믿습니다. 걸리면 끝장이라는 위세로 작대기질을 푹푹 해대었습니다.

 

호박모 떡잎 붙은 모자 쓰고 마을회관에 나타나 삼양라면 끓이는 법에 대해 설명하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그 면서기가 자식의 장래희망이시던 황 교수님 모친께선 소를 길러 아들을 세계가 주목하는 인물로 키웠습니다. 아직도 생존해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