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야후 사이트에서 황우석 교수 생가 복원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네티즌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60%가 넘는 사람들이 생가 복원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고 한다. 나도 싫다. 엄격히 말해 '생가 복원'이란 말 자체가 있을 수 없다. 그 집은 현 상태가 생가의 의미와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외지인들을 위한 대형 주차장을 만드는 게 생가 복원인가? 부여군의 신중한 처신을 바란다. 기사 본문 중 현지 주민의 반응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언급된 '김용하'는 내 친구다. 은산중학교 2학년 시절 잠시 짝꿍이 된 적도 있다. 그는 가난한 환경이어서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난 솔직히 아까운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친구가 굶는 게 안쓰러워 몇 번을 함께 식사하기도 했었다. 친구는 수줍은 표정으로 망설이다가 창밖 개나리 가지를 꺾어와 내 도시락을 덜어먹었다. 친구는 중학교를 끝으로 고향에 정착했지만 그런 기억 때문인지 가끔 고향에서 만나면 아주 각별하다. 지나던 길에도 깜짝 놀라 알아보곤 '종호 아녀?'하며 옷깃을 잡는다. 우리 어렸을 적, 친구의 부친은 방앗간 머슴이었다. 달구지에 찧을거리를 적재하고 방앗간으로 나르거나 다시 가정에 되실어다 주는 일을 맡았다. 수송 책임만 맡은 게 아니었다. 가끔 방앗간 옆을 지나가 보면 먼지를 뒤집어 쓴 친구의 부친께서 고무래로 왕겨같은 걸 긁고 있는 모습이 눈이 띄곤 했다. 친구의 부친은 그렇게 찧은 미곡을 달구지에 싣고 내지리, 합수리, 각대리 같은 심산유곡까지 날랐다. 폭설이 내려 길이 끊기는 날을 제외하곤 며칠 건너 꼭 마을에 나타나는 분이셨다. 그 분 존함이 뭐였더라? 기억이 가물거린다. 사십의 후반에 암에 걸려 돌아가신 친구 아버님... 그 분이 돌아가시자 말들이 많았다. 어느 부락 이장이 죽은 것보다 소문이 컸다. 그럴 것이 방앗간 달구지맨 아닌가? 어느 마을로 향하다가 시장에서 오는 노인네를 만나면 '어서 타셔유'하며 깎듯이 모시던 분이었던 것이다. 혹자는 그 분이 방앗간에서 어렵게 번 돈을 빌려가서 떼어먹은 악질이 있다고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재수 등으로 고향을 떠난 나로선 고향의 모든 것과 사실상 차단 당한 몸이 되었다. 누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저 가끔 고향에 갈 적마다 묻고 만나 듣고 확인하여 아는 정도로 족하였다. 용하에 대한 부분도 예외가 아니었다. 친구가 떠오를 때마다 특별히 변할 것 없는 시골에서 어려움이 많겠구나 하다가 곧 잊곤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는 심상치 않은 인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누구네 밭을 샀네, 산을 샀네 하며 지역 유지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사실 오늘날 친구는 거대한 밤나무 단지와 대형 한우 축사를 거느린 경영인이 되었다. 한길에서 마주치는 친구는 트랙터를 몰고 올 때도 있지만, 땀내나는 얼굴엔 역경을 딛고 일어선 승자의 여유 같은 게 묻어 있다. "용하, 나만 보면 꼭 인사허구 가지. 그 집 형제가 다 그려. 걔들 어릴 적에 보통 고생헌 줄 아냐? 그러더니, 참, 오늘날 저렇게 됐어. 지들 엄마한테 효도하는 걸루 면내에 소문이 파다혀. 그러니께 잘 되는 것이구..." 언젠가 어머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대개 한 세대가 흥하면 한 세대가 망한다고 한다. 그 말은 한 세대가 망하면 다음 세대가 흥한다는 뜻과 통한다. 실제로 우리 어릴 적 떵떵거리던 집안들이 오늘날 자취없이 사라지거나 처참한 꼴로 몰락한 예가 수두룩하다. 무려 30여년 전의 일이 되었지만... 말이 빗나갔지만 용하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도 자만하지 말고, 고향의 어른들도 깎듯이 모시고... 비 개인 하늘이 푸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