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여름이던가? 송림동 현대극장 뒷편 정수장 올라가는 초입 주택가에서 살인사건이 터졌다. 문O대라는 젊은 가정주부가 남의 빈 집 안방에 발가벗겨진 채 죽어 있었다. 한 손에 가위를 들고, 하체에 물바가지 손잡이가 삽입되어 있는 상태로... 그녀의 양쪽 유두는 가위에 의해 잘려 있었으며 늑골 세 대가 부러진 상태였다. 누가 죽였을까?
누가 죽였을까? 그 물음을 위해 현장에서 뛴 날이 100일이 넘는다. 그러니까 3개월이 넘는 날을 오직 현장으로 출근하며 수사에 주력하였다. 이미 지역 건달들은 모두 몸을 피한 상태였다. 많은 날을 허송으로 보내고 하루는 현대극장 맞은편 시장을 거닐게 되었다. 그날 발 밑에서 주운 신문의 하단 광고를 통해 인천문단에 얼굴을 내밀게 될 줄이야. 인천문협 광고를 읽고 보낸 시(詩)가 덜커덕 붙었던 것이다.
송년회 겸 시상식에 참석하자 한상렬 씨가 유독 관심을 보였다. "제물포수필문학회 회장 한상렬입니다." 그 분은 수필문학회에서 활동하면 참 좋을 거라는 말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문협 사무국장을 맡은 이부자 씨도 적극 말씀을 하시어 곧 가입한 곳이 제물포수필문학회다. 그때 함께 활동했던 최임순 씨가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된 기억을 잊지 못한다.
아무튼 제물포수필문학회에 있으면서 쓴 수필의 90%가 고향 얘기였다. 고향 말고는 쓰고 싶은 게 없었다. 다른 소재는 생각나지 않았다. 아는 게 없었으므로... '드러난 아랫도리로 물건('물것'으로 쓴 원고를 출판사 교정직원이 '물건'으로 고쳐놓았음)들이 설쳐도 하나 싫지 않았다' 사건도 제물포수필문학회 시절의 일이다.
출근 직후 하루의 출발선상에 선 이 시점, 향수병(鄕愁病)에 허덕이는 나는 누구인가? 정태춘 박은옥 부부의 '김제벌 까마귀떼' 노랫말에서 끝없는 김제벌 눈보라가 그려지듯 나의 뇌리엔 문득 고향집 울밖에 무성하던 생마(生麻) 밭둑 율무초 푸르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