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의 앤>이라는 작품이 있지만 여기선 100일에 얽힌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혹시 몇 년 전 인천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딸을 둔 학부형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던 사건은 다름아닌 여학생 성폭행 살인사건이었다.
최초 사건은 주안5동 삼덕아파트 옆 <삼덕헬스> 건물 옥상에서 시작되었다. 박문여고 2학년에 재학중인 박O애 양이 <삼덕헬스> 건물 옥상에서 발가벗겨진 주검으로 발견된 것이다. 박 양은 성폭행 흔적이 있었고 늑골 몇 대가 골절되어 있었다. 엽기적인 장면은 그녀의 얼굴과 가슴에 난 족적이었다. 피부에 문양이 선명히 찍힐 정도로 짓밟혔음을 추정할 수 있었다. 선혈이 낭자한 현장의 참혹함. 두부(頭部) 일부가 함몰된 채...
이 사건을 시작으로 도화2동, 신흥동, 구월동, 주안2동, 효성동 등지에서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사건이 줄을 이었다. 특히 주안5동 사건이 터지고 얼마 안되어 청천동 건물 옥상에서 명신여고 3학년 학생이 살해되었는데 박 양과 똑같은 피해를 당했다. 연락을 받고 달려가보니 옥상 바닥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사건이 보도되면서 각 학교 정문엔 야간학습 종료시간에 맞춰 딸을 데리러 나온 학부형들의 자가용으로 넘쳐났다. 상부에선 지휘관들을 압박하고 지휘관들은 일선 형사들을 닥달하였다. 주안5동사무소 2층 회의실을 수사본부로 빌려 쓰는 형사들은 연일 죽을 맛이었다. 하긴 수사라는 게 맨땅에 헤딩하기 각오로 임할 때도 없진 않다. 한여름을 꼬박 주안5동 일대에서 보낸 형사들은 하계휴가도 갈 수 없었다.
딱 100일째 되던 날이었다. 그땐 수사본부 인원을 대폭 축소하여 주안1동파출소 건물 창고를 개조하여 임시로 '수사본부'로 활용하고 있었다. 상부의 독촉도 흐지부지한 상황이었다. 하긴 아무리 강력사건이라도 초동수사 시기를 놓치면 수사의 탄력을 잃게 마련이다.
수사본부에선 강력1팀장 최기헌 씨가 지휘하였다. 그 분은 충남 홍성의 방앗간집 형제 중 장남이었는데 홍성고등학교 시절 씨름선수를 했던 경력이었다. 부리부리한 눈에 거대한 체구는 50의 나이에도 인천체전 출신의 젊은 형사들을 메다꽂을 정도였다.
실제로 형사들은 야외 회식이 있는 날, 송도유원지 모래 백사장 같은 곳을 골라 정식 대련을 붙거나 씨름 경기를 하는데 그 분은 젊은 형사들에게도 지는 법이 없었다. 성격도 급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얘기를 할 땐 금새 낯빛이 빨개졌다. 거기에다 인상까지 긁으면 완전히 산적 스타일이었다.
박 양 사건이 터지고 100일째 되던 그날도 아침 회의시간에 형사들이 꾸중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소수 수사요원 중엔 경기도 이천 출신의 두 직원이 있었다. 중학교 선후배인 그들은 팀장으로부터 꾸중을 듣고 터덜터덜 걸어 시민회관쪽으로 가고 있었다. 보나마나 툴툴거리며 걸었을 것이다.
그때가 오전 열한시쯤 됐을 것이다. 시민회관 광장에서 마주오는 청년 둘과 마주쳤다. 사실 마주오는 사람들이 한 두 명인가? 하지만 형사들의 눈엔 웬지 심상치 않은 청년들이었다. 형사 하나가 마주오는 사람을 잡고 뭘 물으려 하자, 대뜸
"제가 한 게 아닌데요?"
라고 대답을 하더란다. '제가 한 게 아닌데요?' 대답 한 마디가 그들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형사들은 뭔가 불안해하는 청년의 낯빛을 그냥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수사본부로 임의동행됨으로써 수 개월동안 인천을 떠들썩하게 만든 엽기 살인사건도 막을 내렸다.
청송감호소 출신끼리 모의를 하여 여학생들을 성폭행하였는데 이들의 유인에 학생들이 간단히 걸려들었다. 그들은 사전에 빈 건물임을 확인하고 지나가는 여학생에게 가짜 포장지를 건네면서 '이 건물 꼭대기층에 제 은사님이 사십니다. 다리가 아파 이러고 있는데 저 대신 이걸 은사님께 전해주시겠습니까?' 라고 해놓고 아무 것도 모르는 여학생이 포장지를 들고 계단을 오르면 뒤따라가 그 짓을 저질렀다. 반항하는 여학생은 가차없이 내질렀다.
상상해보라! 울부짖는 어린 여학생 얼굴을 운동화로 짓밟는 장면을...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다. 이러한 수법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발생 가능성이 있으므로 어린 딸을 둔 가정의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당시 한 여름을 보내면서 -6월말 발생하여 10월 중순 해결- 먹쇠 별명이었던 이정세 선배가 과로사로 운명을 달리 했다. 혁띠에 타올을 걸고 다니며 땀을 훔치곤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주인 잃은 책상 위에 며칠동안 놓였던 조화(弔花)도...
인천구치소에서 재판 대기중 범인 하나가 모포깃을 찢어 철창에 목을 매 자살하는 사건이 생겨 현재 한 사람만 복역중인 걸로 알고 있다. 목을 맨 범인은 인상부터가 악랄해보였다. 귀두와 성기에 군데군데 구슬과 칫솔대를 박은 우람무식한 놈이었다. 어쩌면 평생을 썩느니 현명한 길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본문과는 다르지만 서두에 말한 <천일의 앤>에 대해 잠깐 언급하자면 헨리8세의 총애를 받았던 앤 볼린에 관한 이야기다.
헨리8세가 결혼 전 앤에게 보냈다는 편지 한 토막. "엄격한 당신이 몸과 마음을 허락한다면 당신은 앞으로 나의 `유일한` 연인이 될 것이오. 오로지 내 마음은 당신만을 위해서 봉사하게 될 것이오. 영원히 당신의 사람으로 남고 싶은 사람이..."
그러나 결혼하자마자 헨리8세는 그녀에게 싫증이 났고 원하지 않은 딸을 낳은 앤은 버림받게 된다. 앤이 왕후자리에 있었던 기간은 꼭 1천일, 그래서 후일 사람들은 그녀를 `천일의 앤`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