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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마차

펜과잉크 2005. 6. 20. 11:03

 

GOP 철책근무는 경계근무가 최우선이다. 우리도 여름과 겨울에 각 한 번씩 4주 일정으로 GOP에 투입이 되었다. 녹음기(夏節期)엔 DMZ 수색및 정찰 명목으로, 혹한기(冬節期)엔 경계지원 명목으로 투입되었다.

 

처음 GOP에 도착하여 현지 부대원들과 족구 시합을 했다가 패한 후 중대장으로부터 전체 기합을 받은 기억이 생생하다. 협소한 지형에 익숙한 현지 부대원들은 적어도 족구에 있어서만큼은 특공대 요원들보다 몇 배 나은 실력이었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근무 특성이 달랐지만 지금의 내게 기억되는 건 현지의 낯설음이었다. GOP 철책에서 밤을 새노라면 그리운 건 고향과 부모형제 뿐이다. 가령 어린 동생들과 함께 했던 옛시절이 눈물을 동반한다. 멀리 고지 능선을 따라난 철책의 전조등 불빛이 한적한 시골 역사(驛舍)에 머문 열차와도 같은 환상이 일었다. 밤마다 새벽마다 나는 그 열차에 몸을 싣고 강원도 험산 구릉들을 제치며 고향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미명이 밝아오면 눈 깜짝할 새 눈부신 햇살이 밤새 초소에서 시달린 눈꺼풀을 옥죄어들었다. 현지 GOP 병사들은 오침만 3-4시간씩 자는 게 전부였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오전에만 3-4시간 재우고 오후엔 체력단련이나 불모지 작업에 동원되었다. 우리는 지원부대라는 이유로 별도의 지시 명령에 따랐다. 불모지 작업에 동원될 일도 없어 잠도 충분히 잤다.

 

GOP에서 가장 기다려지는 게 보급품이었다. 보급품은 2-3일에 한 번씩 트럭으로 수송되었다. 트럭이 먼지를 일으키며 저 아래 계곡을 오르기 시작하면 모두 흥분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거기엔 쌀과 반찬뿐 아니라 우편물도 실려 있었다. 바깥 세상과 이어지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휴가병도 그 트럭을 타고 부대까지 출발했다. 부대에 도착하여 휴가 신고를 해야 비로소 휴가병 자격이 주어졌다. 군인들은 보급품 트럭을 황금마차라고 불렀다. 황금을 가득 실은 마차...

 

1980년 초반, 강원도 양구와 인제 군부대에서 복무를 했거나 애인 면회를 다녔던 분이 계실줄 믿는다. 동마장터미널에서 출발하던 금강여객 버스는 팔당댐 국도를 타고 홍천을 지나 소양강변 구절양장 산간도로를 반나절이나 달렸다. 양평을 지나면서부턴 포장도 되지 않은 도로였다. 버스가 양구대교 혹은 인제대교를 건널 때의 단절감이 한숨 쉬었을 사람들이 많았으리라 믿는다.

 

요즘 군대는 어떤가? 우리집에도 현역병이 있어 잘 안다. 수시로 전화가 온다. 대신 우리 시절의 '군사우편' 같은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며칠 간격으로 오는 전화에서 모든 게 해결된다.

"잘 지내고 있어요. 걱정 마세요. 잘 먹고 있답니다."

그게 전부다.

이번 연천 사고를 읽으면서 GP 병사들도 외부(고향집)로 전화를 건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비무장지대(DMZ)에서 외부와의 통화가 가능하다니. 세상이 그 정도로 바뀌었다. 천지개벽이란 표현이 무색할 지경인 군대에서 전우들을 살상하는 사건이 터졌다는 비보에 충격이 크다.

 

문득 푸른 제복의 군인이 되어 조국(고향)과 민족(부모형제)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리라 다짐했던 옛날이 떠오른다. 조국과 민족의 이름 앞에선 언제 죽어도 좋았다. 정말로 그 두 마디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나는 철모 표피에 굵은 매직으로 '나는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치리라!' 라고 적었다.

 

피끓는 전우애로 뭉쳐야 할 최일선 GP에서 국군 장병이 전우들을 향해 총을 갈겼다는 사실이 참으로 가슴 아프다. 도대체 어디 군대인가? 한낱 주검이 되어 황금마차 짐짝에 실려 덜컹이는 산악도로를 내려왔을 영혼들에게 삼가 조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