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추억의 얼굴들

펜과잉크 2005. 11. 18. 09:34

 

오랜만에 까페에 들러 사진란에서 친구들을 보니 어제 일 같은 추억들이 눈 앞에 스친다.

 

사진의 맨 왼쪽 흰색 바탕에 빨강 줄무늬 옷을 입은 친구가 환교다. 저 친구가 사진에 찍히지 않은 영구란 친구와 둘이 향O 이란 여자 친구랑 수목리 경O이네 집에 놀러가다가 수목리 건달들에게 걸려 얻어 맞을 뻔한 일이 있었다. 친구들이 살던 가중리와 수목리까진 십리 가까운 길이지만 학군이 같아 더러 아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래 향O이 친구 경O이가 수목리에 살아 그 친구를 만나러 갔던 모양이었다.

 

당시 환교는 강경상고에 재학중이었고 영구는 부여고에 다니고 있었다. 난 우열반 시절, 수목리 동창 두 명과 우반에서 공부한 경험이 있어 아는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학군이 다른 환교와 문과와 이과로 나뉘어진 인문계 학교의 특성으로 인해 영구는 수목리 친구들을 몰랐던 것 같다.

 

아무튼 환교와 영구가 향O이와 함께 수목리 경O이네 집에 가다가 그 동네 불량배들과 마주쳤다. 그들을 텃세를 부리며 두 친구에게 겁을 주었다. 두 친구가 향O이를 먼저 가게 해놓고 뭉둥이와 돌멩이를 들고 6-7명과 대치했다가 용케 위기를 벗어나 귀환(?)하게 된다.

 

근데 문제는 이 사실을 친구들에게 제보함으로써 벌어졌다. 사진 속의 맨 우측 중범이란 친구의 주먹 파괴력이 대단하다. 그는 나와 함께 8온스 글러브를 끼고 스파링을 하곤 했는데 서로 상대를 경계하여 격렬한 시합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난 그의 주먹이 파괴력이 있음을 익히 알고 있었다. 사실 사진의 맨 오른쪽 중범이와 두 번째 규일이는 힘이 장사다. 사진에 나온 인상 그대로다.

 

환교로부터 얘기를 전해들은 중범이는 두현이(사진의 오른쪽에서 네번째)에게 상의했고, 두 사람은 수목리까지 가서 복수를 하기로 작정한다. 그래 수목리 초입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두 학생을 두들겨 패서 이빨을 부러뜨린 사건이다. 아마 중범이에게 맞은 이상 온전치 못했을 것이다.

 

사건의 소문은 금새 온 마을에 퍼졌고, 두현이네 집에서 두 학생 치료비를 물어준 걸로 알고 있다. 당시 두현이는 교장 출신이신 부친의 덕분에 중범이네보다 월등히 유복한 환경이었다. 두현이 아버님은 '조규홍' 존함으로 우리의 은사님이시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두현이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오늘날 두현이네는 풍비박살이 나서 쫄딱 망하고 말았다. 거액을 대출자금으로 끌어들여 사채 이자놀이를 했던 큰누님이 부도 나면서 모든 게 끝나버렸다. 그토록 곱게 자란 두현이는 오늘날 홍성 근처에서 전화케이블 매설 공사장 인부로 일하고 있다. 고정 월급쟁이는 채권자들의 압류로 인하여 일당제 노동 밖엔 못한다는 전언이다.

 

오른쪽 두번째 규일이는 아직도 미혼으로 고행을 지키고 있다. 한때 중동에 두 번이나 다녀왔지만 아버님 병 구완으로 모두 날리고 빈털털이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불쌍한 내 친구... 환교는 대전에서 안정된 삶을 살고, 사진의 가운데에 앉은 난 인천에서 쥐뿔 월급쟁이로 살아가고 있다.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보고 싶은 친구들이다. 언젠가는 다시 한 자리에 모일 것이다. 그들과 함께 오손도손 얘기 나누며 하얗게 눈 덮인 설원의 산길을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