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Pen 혹은 文學

자료 일부

펜과잉크 2010. 2. 23. 00:45

 

11599

 

6. 부산의 이별

 

 

 

바람 부는 날이 많아졌다. 비릿한 냄새를 품은 바닷바람은 어디서나 쉽게 마주쳤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회색 하늘이 잦아지고 몸이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길이 춥게 느껴지는 계절이었다.

 

준호는 곧 짐을 꾸려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지혜에게서 온 편지들도 포장했다.

― 고향에 가면 만나겠지. 한시도 잊을 수 없는 너. 시험이 끝나 합격의 영광을 맞게 되었을 때, 너와 함께 금강의 갈대숲으로 갈 거야. 양지바른 백사장 언덕에서 너를 위해 색소폰을 불어주마.'Belive Me If All Those Endearing Young Charms(봄날의 꽃과 화사함)'을 연주해야지.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부산에서의 일들이 아쉬움으로 회억되었다.

 

준호는 문득 수경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선배의 미술학원을 오가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 지난 몇 개월간의 일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더러는 서운할 때도 있었지. 그녀가 자기 멋대로 행동하려 들 때, 그때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엄격히 보면, 텅빈 집에서 생활하며 그녀의 신세를 숱하게 진 준호였다. 준호는 끼니때마다 밥상을 차려놓고 자신을 부르곤 하던 수경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나이로 치면 수경이 한 살 위였다. 당돌할 때도 있었지만, 어찌 보면 그것은 그녀의 개성일 뿐 여자만의 인자함이 무딘 편도 아니었다. 이제 부산을 떠나면 그녀와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

 

준호가 떠난다고 말했을 때 수경은 동그마한 눈빛이 되었다. 그녀는 프렌치 코트를 벗다가 말고 준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준호는 좀더 확실한 어투로 부산을 떠날 거라 말했다. 그녀가 몸을 돌려 창쪽을 응시했다.

"벌써 그렇게 되었군요. 언제 떠나세요?"

"곧……."

"떠나셔야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목소리가 힘없이 들렸다. 준호는 떠나기 전 수경에게 식사 한 끼쯤 대접해야겠다고 작심했다.

 

밤이 깊어갈 즈음, 준호는 그녀의 방문을 받았다. 그녀는 커피잔을 들고 서있었다. 문을 열어주자 조심조심 다가 와 한잔을 준호에게 내밀었다. 짙은 커피향이 코끝으로 배어들었다.

수경은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회사를 경영하는 그녀의 부친은 집에서 볼 수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새벽이면 창원에 있는 회사로 출근을 하였는데, 주말에도 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수경의 말로는 마산 의료원에 입원한 모친 때문이라고 하고 회사 성격상 사람들과의 약속 때문이라고도 했다. 집에 들러도 새벽에 출근을 하기 때문에 준호와 마주치는 일이 드물었다.

 

"아빠가 그러셨어요. 준호씨 아버님과는 오래 전부터 막역한 사이라구요. 아버님이 서울에서 사업을 하셨다면서요? 그때 서로 알게 돼 친해지셨다고 그래요."

얼마 전에 수경으로부터 들은 얘기였다.

준호는 언젠가 아버지로부터 부산의 친구 분에 대해 들은 기억이 났다. 서울사람이라고 하신 분은 바로 수경의 부친이었던 것이다.

"아빠 사업도 예전만은 못해요. 경쟁업체들 때문에 안 좋았거든요. 저도 고등학교 일 학년 때까지 줄곧 서울에서 살았지요. 홍제동, 거긴 참 조용하고 아늑했었는데……. 엄마가 결핵을 앓으셔서 고생을 많이 하세요. 그런 일로 집안이 위기를 맞은 적도 있고요. 엄마가 병원에 자주 입원하시고 동생이 입대하고 나니 집안이 썰렁해요. 맨 처음, 준호씨 아버님하고 통화하시고 아빠가 참 좋아하셨어요. 집안엔 남자가 있어야 든든하다고 하셨지요. 전 성격이 모나다고들 하는데, 그런 점 때문에 준호씨가 부담스러워 하는 걸 잘 알아요. 사실, 믿음직스러웠어요. 언짢을 때도 별로 내색하지 않는 걸 보고 매력이 있는 남자구나 생각 했죠. 언제 떠나세요? 술 한 잔 사고 싶어요. 떠나더라도 부산 잊지 마시구요. 대학에 가면 한번 오세요. 제가 연락을 드릴까요?"

수경이 여느 때와 다르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것이다. 함께 있을 땐 상대방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다. 떠나고 나서야 그리워진다. 헤어짐을 앞둔 수경의 말엔 진지함이 배어 있었다.

 

준호는 잠결에 방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눈을 떴다. 그림자 하나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

"수경이에요."

어둠 속에서 말했다.

"……."

"들어가도 되죠?"

"지금 몇 신데……."

준호는 수경의 출현에 주춤했다.

"모르겠어요. 새벽이겠죠."

수경은 취한 목소리였다.

"술을 드셨나요?"

"네."

그녀가 천천히 다가왔다.

"혼자 있었어요. 언제 떠난다고 하셨죠? 내일? 모레? 떠나면 부산엔 안 오시나요? 난……, 무서워요. 아무도 없으니까. 준호씨가 가면 우리 집엔 저 혼자예요."

"파출부 아주머니가 있잖아요."

"밤이 무섭다는 거죠."

수경은 털썩 몸을 꿇었다. 준호가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의 몸에서 알코올 냄새와 샤워코롱 냄새가 났다. 팔을 잡아 일으켰다. 취기 가득한 그녀가 일어서려다가 준호에게로 쓰러졌다.

"잠깐만! 그대로 있어줘요."

수경의 뜨거운 호흡이 귓볼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준호의 입술을 찾고 있었다.

준호는 젖은 입술이 강한 흡착력으로 와 닿는 걸 느꼈다. 입 안 가득 정복해오는 입김이었다. 한 마디도 할 수 없는 불시의 압박이었다.

 

준호는 몸의 한곳이 기립하며 터질 듯 팽창하는 걸 알았다. 그는 수경을 침대에 뉘었다. 그의 거친 입술과 손이 동시에 수경의 껍질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팽팽한 볼륨의 젖가슴이 터지기 전의 튜브 같았다. 준호는 아래쪽의 천조각마저도 밀어 내었다. 수경이 도와주었으므로 그것은 너무 쉽게 벗겨졌다. 준호는 그녀에게로 힘차게 돌진해 들어갔다. 수경은 마치 수두를 앓는 아이 같았다. 준호의 몸이 밀착될 때마다 그녀의 몸에선 열이 끓었다. 그녀는 온 사지로 준호를 휘감고 리드미컬한 몸짓으로 유도해 나갔다. 수경의 의식이 추락하면서 자꾸 숨 끊어지는 소리를 냈다.

수경은 준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준호와의 이별이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떠나면 그만이었다.

준호는 말했다.

"여자가 있습니다.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가졌고 영원히 사랑할 겁니다."

그는 지혜를 떠올렸다.

"저와 상관없는 문제예요. 부산을 떠나는 날까지만 함께 있어 주세요. 준호씨가 좀더 강한 이미지로 남아있기를 바래요. 준호씨를 너무 늦게 알았어요. 그게 아쉬워요. 여자가 순정을 바칠 땐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예요. 사랑 없이는 아무런 행위도 할 수가 없어요. 그런 거예요."

수경은 진지한 어조였다.

"인연이 있으면 만나게 되겠지요. 수경씨가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마음속으로 빌고 있을게요."

그러나 준호는 수경을 다시 만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부산을 떠나던 날은 아침부터 하늘이 흐려 있었다. 바람까지 부는 을씨년스런 날씨였다.

수경이 부산역까지 배웅하기로 했다. 그녀의 부친이 대문 밖까지 나와 준호에게 악수를 청했다.

"잘 가게. 아버님께 안부 전해 드리고. 연락주기 바라네."

그는 준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승용차가 주택가 소방도로를 빠져나가는 동안 준호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세탁소와 분식집이 멀어졌다. 제과점과 구멍가게, 토큰 판매소와 어린이공원, 우체통이 스쳐 지나갔다. 모두가 아쉬운 풍경이었다.

차가 대로로 접어들었을 때 준호는 눈을 감았다. 수경도 말이 없었다. 차가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하시는 거예요?"

준호는 수경의 소리에 눈을 떴다. 차가 방송국 앞을 지나고 있었다.

"마음이 무거워요. 대전을 떠나올 때도 마찬가지였거든요."

"부산에서의 체류가 오래 기억되겠죠?"

수경이 웃었다.

"기억에 남겠지요. 수경씨도 잊지 못할 겁니다. 그동안 신세 많았구요. 어머님이 하루빨리 완쾌되셨으면 좋겠네요."

"고맙습니다."

 

부산역. 끝없는 만남과 이별의 포지션.

사람들은 떠나간다, 다음을 기약하며. 그러나 미래는 항상 불안정하다. 사람들은 불안한 미래 때문에 작별을 아쉬워하는지도 모른다.

대합실에는 주호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신문을 읽는 그의 모습이 어느 때보다도 쓸쓸해 보였다.

수경이 매표구로 뛰어갔다.

주호가 신문을 거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건강해. 청주에 올라가면 연락할게. 남은 기간도 열심히 하라구. 이번엔 되겠지. ……아쉽군. 좋은 벗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는 안경테를 바로잡았다. 그의 얼굴에 아련한 기색이 머물다가 사라졌다.

"열 한 시 삼 십분 발 새마을 열차예요. 시간이 촉박해요."

수경이 표를 내밀었다.

"건강하세요."

"수경씨두…….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잘 가."

준호는 그들의 인사를 뒤로 하고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 안녕. 나의 숨결이 배인 곳, 부산.

그의 의식으로 지난 일들이 단상으로 이어지며 빠르게 반추되었다. 태종대와 용두산공원, 서면 거리, 남포동의 밤, 용호동 바닷가, UN묘지, 그리고 사람들…….

열차가 부산진을 지나고 속력을 낼 즈음 준호는 창밖을 보았다. 저만치 시민회관 건물이 보이는 근처 어디 학원이 있을 것이었다. 독서실 건물과 공원 입구의 포장마차. 그러나 건물은 또 다른 건물에 가려져 있었다. 준호는 다시 한 번 속으로 되뇌었다.

― 잘 있거라, 부산이여. 죽을 때까지 영영 잊지 않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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