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일주일 여정으로 강원도와 부산, 고향에 다녀왔다. 강원도는 군시절 추억으로 가끔 다녀오곤 한다.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생기면 꼭 찾아가 옛날을 회상하곤 한다. 흙 한 줌, 돌 하나도 옛날 모습 그대로 나를 반겨줄 것만 같다. 부모형제 생각날 때 끌어안고 남쪽을 바라보곤 하던 메타세콰이어 나무...
홀연히 떠난 강원도에선, 그러나 휴대폰 전원까지는 어쩔 수 없어 수시로 걸려오는 세속의 잡다한 소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다음에 다시 기회가 오면 출발할 때 휴대폰을 장롱에 처박아두고 떠날 작정이다. 휴대폰이 있으면 영혼이 맑아질 수 없다.
짐이 모자라 배낭 두 개를 챙겼다. 작은 배낭엔 주로 취사용품이 들어있다. 랜턴도 두 개... 버너, 코펠, 가스통... 등에 짊어진 배낭은 독일군용 80리터짜리 대용백이다. 무리하면 100리터까지 들어갈 듯...
콘도에서의 취사... 혼자 먹는 밥이라 바닥이 보일 정도로 소량을 지었다. 쌀을 물에 담가 1시간 정도 흐른 후에 지었더니 아주 부드러웠다. 이젠 밥 짓는 기술에도 익숙해졌다.
콘도에 머무는 동안 TV는 한 번도 켜지 않았다. 대신 틈만 있으면 라디오를 틀었다. 수도권에서 들었던 방송들을 거의 들을 수 있어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 대신 지역에 따라 주파수가 약간 달랐음. 좆나게 많이 다른 곳도 있었다.
용대리 계곡의 한 지점이다. 옛날에 저 길을 숱하게 다니며 훈련을 받았다. 그때 우리가 산기슭의 저 바위를 보면서 전우 몇이 정상까지 올랐다가 내려왔는데 당시 여자 고무신이 나란히 놓여있어 전우 몇이 아래쪽을 샅샅이 뒤진 기억이 있다. 하지만 유언비어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저 바위는 건장한 남자도 맨손으로는 오르지 못한다. 중간에 떨어지면 최소한 중상임.
창암(窓岩) 계곡이다. 저 계곡으로 3킬로쯤 들어가면 마장터(馬場-)란 고을이 나온다. 한때 마장터는 30여호 정도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한다. 진부령과 미시령이 개통되기 전, 속초 등 해안지방의 특산물과 인제 등 내륙지방의 특산물을 맞바꾸던 물물시장이 형성되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60-70년대 무장공비의 출현과 이에 맞선 아측의 토벌작전이 연이어지면서 박대통령의 지시로 주민들을 이주시키면서 쇠락하고 말았다. 현재 마장터엔 50대 중반의 남자와 60대 후반의 남자 두 분이 각기 다른 움막집에서 기거하고 있으나 겨울엔 환경이 워낙 척박하여 마을에 내려왔다가 이듬해 봄에 다시 올라간다고... 산나물을 채취하기 시작하면서 마장터도 긴 침묵으로부터 깨어난다고 한다.
사진의 개울 건너 바위가 창암(窓岩 : 바위 중앙에 구멍이 뚫린 데에서 비롯된 이름)이고, 왼쪽 개활지 시설물이 우리 부대 즉각조치 훈련장이다. 하지만 미시령 구간의 교통량이 증가하면서 교장도 은밀한 지역으로 옮겼다고 들었다. 저 교장에선 간단한 교육만 이루어지는 줄로 안다.
부대는 숲으로 가려져 있다. 신록의 숲이 메카사콰이어 삼림이다. 26-27년 전의 숲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성장 속도가 어지간히 느린 나무로 보인다. 숲 사이로 보이는 시설물이 빈약해 보일지 몰라도 내 삶에 가장 잘 먹었던 시절이 저기서 생활할 때였다. 사진엔 우리 2대대 막사만 조금 보일 뿐이다. 메타사콰이어 숲에 앉아 휴식을 취하거나 나무에 기대어 서서 혹은 끌어안고 고향 생각에 젖곤 했다.
용대삼거리 방향이다. 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진부령 방향이다. 1996년 강릉잠수함 침투사건 때 마지막 잔당들을 섬멸한 연화동 계곡도 그 방향에 있다.
아래 사진은 5월 11일 부산에 도착해서 부산역전 <a TWOSOME PLACE>에서 찍었다. 만년필에 관한 한 하루종일 얘기해도 모자랄 것이다. 부산에 사는 파카21님은 만년필에 투명 테이프를 감아 사용했다. 사소한 스크레치도 용납할 수 없는 분이다. 만년필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알 수 있다.
파카 21님의 만년필로 시필하다.
파카21님...
부산역전 지하도 입구에서 파카21님과 함께... 본명은 손철욱 님이다.
용두산공원 기슭의 카페 <Bridge>에 들렀다. 이곳은 평소 까페로 개방되었다가 주일날 예배와 찬송이 이루어진다고 들었다. 까페를 운영하시는 분들도 교회 관계자들이었다. 목사님과 장로, 집사 등등... 까페 바로 아래 오랜 전통의 가죽공방이 있다. 여주인의 매너와 에티켓이 거의 개통 수준이지만 남자 장인의 기술이 탁월하여 고정 손님이 많다고 들었다. 내 가방끈도 그 집에서 수리했다. 그 집의 아주머니는 마인드를 바꿔야 한다. 어떻게 손님이 주인의 눈치를 봐 가면서 말을 해야 하냐? 세상에 그런 장사꾼은 처음 봤다. 장사가 손님 비위를 맞추는 게 아니라 손님이 주인의 눈치를 봐야하는 세상의 유일한 곳이 아닐까 싶다. 아주머니 말투가 영 안좋다. 그 집에 들어가 아주머니랑 대화해본 사람 중 기분좋게 나온 사람이라면 로또복권을 사도 괜찮을 듯...
까페 <Bridge>에서 광복동으로 넘어가는 용두산길이다. 축제 준비를 위해 가로수에 연등을 설치한 풍경이 이색적이다. 뭐 썩 바람직해보이진 않는다. 자연의 미관에 인위적인 요소가 추가되어 아름다워 보이는 예가 거의 없다.
예전에 고충진 씨가 클래식기타 연주회를 가졌던 공간이 아닐까 추측되는 지하...
자갈치시장의 어물전 골목이다. 저기서 오징어포, 쥐포, 명란젖을 조금씩 샀다. 집에 와서 먹으니 과연 별미이다. 명란젖을 칼로 살짝 그어 들깨를 조금 뿌리고 기름을 살짝 발라 먹으면 끝내주는 맛을 느낄 수 있다.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만큼 맛있냐고? 그 정도는 아님!
광복동 거리의 작은 찻집. 자전거가 걸려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와 찍었다. 커피 한 잔에 2,000원이지만 그 향은 일류 커피와 다르지 않았다. 베리 굳~!
POLE 362
내 가는 곳 글이 없을 수 있나? 커피잔을 앞에 놓고 속필로...
부산역전 아리랑호텔 커피숍 <Angel>에서 차를 마시며 찍었다. 만년필은 파카사의 제품이다. 여성의 신체를 연상케하는 곡선미가 특징이다.
광복동 롯데백화점 옥상에서 바다 건너 영도를 찍었다. KTX 시간이 남아 택시 타고 가서 구경하다가 열차를 놓칠 뻔 했다. 1분 전 폴렛홈에 도착... 거의 기적적이었다.
부산에서 올라온 12일, 밤에 고향집에 내려갔다. 13일(일) 날 조부모님 산소 사초를 위해서였다. 고향집에서 자다가 새벽 4시 35분경 옆구리가 따끔하여 반사적으로 일어나 불을 켜보니 이불 속에 커다란 지네가 한 마리 들어있다. 재빨리 물린 부위를 눌러 피를 뽑아내고 -지네는 독충이다- 지네를 사로잡아 빈병에 넣었다. 이튿날 지네를 풀어줬다. 나를 물었다고 죽일 순 없는 노릇, 지네가 나를 문 게 아니라 내가 지네의 허락없이 지네의 삶의 터전에 침범한 불청객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지네에게 기습 당한 옆구리 뱃살... 아직은 똥배 수준이다. 더 살을 빼야겠다. 내 몸에서 얼굴이 말라보이는 것 빼면 다른 부위는 과체중이다. 허리 36인치...
고향집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 어느 진수성찬보다 맛있어 보인다. 아아, 어머니...
조부모 산소 근처의 밤나무 묘목... 수 천 주를 헤아린다. 성희 숙부님 소유의 밤나무 묘목이다. 대양리에 15만평의 밤나무 단지를 보유하고 계시다.
다시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 앞으로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상을 몇 번이나 먹을 수 있을까?
어머니의 뇌경색 증상이 악화되어 아산현대병원에 진료차 13일 오후 서울 강동구 강일동 강일리버파크 여동생 집으로 모셨다. 주방에서 일하는 여동생의 뒷모습이다. 자존심이 강하고 성격이 지나칠 정도로 깔끔하다. 가끔 말투가 쌀쌀맞아 통화하고 나면 재수 없다고 느낄 때가 있다. 큰오빠인 내게 무슨 불만이 있는 듯... 있어봤자다. 죽을 때까지 아쉬운 소리 할 일이 없을테니... 피차!
깔끔함은 우리 형제들의 공통점이다. 시골에서 나고 자랐지만 도시 사람들 못지않게 깔끔을 떨며 자랐다. 난 한길을 걷다가 달구지 소똥이 보이면 눈을 지그시 감고 비켜 지나갔다. 더러운 꼴을 보기 싫어서였다. 그거 보고 집에 와서 밥을 먹노라면 밥상이 온통 소똥으로 보이는 등 비정상적인 현상이 일곤 했다. 내 성격이 평탄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거니 더러운 꼴은 싫음.
어머니와 TV를 보면서... 함께 간 아우가 찍었다. 난 지금까지 어머니 손을 한 번도 잡지 못하고 살았다. 어머니 살으실 제 한 번은 잡을 수 있을까?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안방의 장롱 한 번 부모님 몰래 열어본 적 없다. 아우들은 어릴 때 아버지 바지에서 동전도 훔친 적이 있다고 하던데 난 그런 건 꿈도 못꿨다. 그렇다고 마냥 순수하게 자랐다는 뜻이 아니다. 동네 애들과 싸움을 내노라 할 정도로 자주 했고, 동네 과수원 서리사건엔 항상 내가 주동자급으로 개입해 있었다.
여동생 집의 소품들... 평소 성격이 엿보인다.
어머니와 함께 저녁 식사...
얼마 전 경북 상주예식장에서 있었던 막내아우 결혼식 사진이다. 금년 서른여섯인가? 아무튼 그 정도 나이인 줄 안다. 제수씨와는 10년 가량 연애할 걸로 안다. 아버지 살아계실 적에도 고향집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다. 사돈들 상견계 때 그 얘길 무심히 했다가 안사돈님 표정이 어두워지는 걸 볼 수 있었다. 사돈께서는 둘이 만난 게 최근인 줄 아시나 보았다. 절대 그렇지 않음! 만난 직후 애를 낳았으면 초등학생이 되었을 것이다. 그걸 왜 모르실까?
내 아우 중 생활력이 제일 강한 수일이다. 자존심 또한 강해서 아쉬운 소리 한 번을 모른다. 어려서 귀엽게 자란 탓에 개성이 남다른 데가 있지만 우리 집안의 강직성을 제대로 갖춘 성격이다. 제수씨도 우리집으로 시집 온 여자 넷 중 가장 원만하고 모범적인 성품이다. 올해 중학생이 된 조카의 교육도 아주 잘 시켜 공부 잘하고, 특히 포크 기타 실력이 수준급이라고 들었다. 일찍부터 학원에 보낸 줄로 안다.
결혼식이 끝난 후 함께 찍었다. 뒷줄 왼쪽이 조카 희순이다. 내 졸작 <감꽃편지>의 주인공인 조카들이 저렇게 컸다. 지금은 어디에 내놔도 부족함이 없는 형편이 되었다. 왼쪽에서 두번째가 여동생 재현이다. 그리고 나, 막내동생 상권이, 큰집 사촌 금선이 누나, 길순이 조카(희순이 언니), 기택 아우, 덕용이... 앉은 아이가 재현이 아들 박지환이다. 여동생은 안성의 박씨 집안으로 시집 가서 아들 하나를 낳았다. 현재 서울시 강동구 강일동 강일리버파크에 살고있다.
아들 지석이와 함께 찍었다. 아우 결혼식 후 공항까지 저 차로 에스코트한 걸로 안다. 신장이 178센티, 체중 105킬로그램이다. 방금 전 전화로 재확인한 부분이다.
강일동 여동생 집에서 함께 식사 중인 셋째아우 기택이... 아버지 성품을 제일 많이 닮아 인자하기만 하다. 세상에 법 없이도 살 성격이다. 요즘 세상에 그런 식으로 사는 게 최선은 아니지만... 금년 마흔이 넘었다. 미혼이다. 둘째아우도 올해 마흔여덟인데 미혼이다. 호적상 깨끗한 청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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