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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961년 생으로 6. 25 종전 후 10년도 안 돼 태어났습니다.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1955-1963)의 중심 멤버인 셈이죠. 저희 어릴 때 고향마을 이집 저집 회벽엔 '반공' 혹은 '방첩'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모두 붉은색 글씨였어요.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좋은 색깔입니다. 전후 복구를 위한 문구도 있었는데요, 바로 '再建'이었습니다. 인적 통행이 잦은 길가 벽마다 '재건' 또는 '再建'이 찍혀 있었습니다.
조금 전,
일산병원에 입원 중인 둘째아우를 데리고 왔습니다. 저희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맛있는 것 좀 먹이고 싶어서요. 다시 살아난 아우가 고마울 따름입니다. 16일 경 고향집으로 데려다 놓고 2-3개월 충분히 요양시킬 계획입니다. 일산 집은 모두 시정장치를 해놨습니다.
아우는 13년 전 만성 위궤양으로 위와 대장의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 후 건강이 회복되어 친구와 전통음식점을 -두부를 소재로 한- 하면서 빙암벽 등반의 전문가 수준에 이르렀지요. 그러다가 2년 전부터 다시 속이 안좋아 약을 복용하다가 지난 9월 19일 일산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제가 입원을 시켰어요. 통화 중 음색이 이상하여 찾아가니 시체 같은 몸으로 누워 신음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친구에겐 고향에서 쉰다 했으므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더군요. 정밀 검사 결과 위궤양이 심해 위와 대장에 천공(穿孔)이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위의 염증이 대장에 옮아 두 기관이 구멍으로 연결되어 음식물이 대장으로 직접 흘러내릴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소화가 될 리 만무지요. 피골이 상접하다시피 한 몸에 각종 약물투여와 혈당회복 치료를 한 후 10월 2일 날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당일 저희집은 그야말로 초긴장 상태였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향집 아버지께서 오토바이에 밤자루를 싣고 산을 내려가시다가 전복되어 늑골 골절로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척추와 연결되는 부위라 걱정이 태산만했습니다. 상황을 처음 겪는 저로선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몹시 혼란스럽더군요. 장남으로서 팔을 걷고 나서야만 했습니다. 부여신경외과의원장에게 부탁하여 아버지를 공주현대병원에 입원 조치토록 했습니다. 그래 지난 9일 날 무사히 수술을 마쳤답니다. 그날은 사전부터 홍콩 출국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빠질 수 없는 상황이었죠.
9일 아침 공항에서 현대병원과 일산병원에 전화를 걸어 환자 동태를 확인하고 홍콩에 가서도 인터넷 전화가 가능한 숙소를 잡았습니다. 그래 수시로 현대병원, 일산병원, 고향집, 아버지, 둘째아우와 통화했습니다.
아버지 연세가 금년 일흔여섯인데요, 건강만큼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원래 술을 안 하시고, 세상 걱정이 없는 분이십니다. 10일 오후에 전화를 드리니 당장 퇴원하시겠다는 거예요. 한참을 말려 12일 퇴원하시도록 했답니다. 그래 오늘 전화를 드리니 논에서 일하시는 중이라네요. 어안이 벙벙할 수 밖에요.
지금 생각하니 잠깐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것 같습니다. 아버지도 고향집에 여전하시고, 둘째아우도 무사히 수술을 마쳤으니 말입니다. 이제 2-3개월 푹 쉬게 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업무는 친구가 있으니까요.
한때 운동권의 핵심 멤버로 지명수배되어 정규 뉴스에도 나왔던 아우입니다. 군사정권 때 강원도 고한에 있는 탄광에 위장 취업하여 수 백미터 수직 갱에서 석탄을 캤지요. 화약을 허리춤에 달고 수직 갱도를 오르내리는 탄부시절에 위장병을 얻어 김영삼 정부 시절 수배가 해제된 직후 수술을 받았습니다. 아우를 찾으러 가는 도중 태백 시내 서점에 들렀다가 이념서적으로 빼곡한 분위기를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문민정부 이후 뚜렷한 명분이 없던 차에 운동권 출신과 음식점을 연 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무튼 터널을 지나온 지금 긴 안도의 숨을 쉬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로 아버지의 위대함과 아우의 소중함을 다시 깨달았지요. 종교가 없는 저로서 부모님은 성스러운 분이십니다. 아울러 아우들도 다 소중하고요. 누구 하나 없어선 안될 존재들이지요.
둘째아우는 지금 책을 읽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어릴 적부터 독서에 익숙했거든요. 마흔넷까지 미혼으로 사는 아우지만 그만의 삶을 인정하고 싶습니다. 어머니는 아우가 고향집에 오면 충분히 몸보신을 시켜 주시겠다 하십니다. 어서 빨리 아우의 몸이 완쾌되어 예전처럼 암벽과 빙벽을 자유로이 오를 수 있길 바랍니다. 재건! 굳건히 우뚝 설 것을 믿습니다. 아우의 메모 중 따로 수집해놓은 일부를 옮기면서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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