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이 생각 저 생각

3.5 디스켓 속의 우주

펜과잉크 2008. 10. 21. 15:45

 

 

 

 

얼마 전,

오랜 친구랑 통화 중 친구가 옛날 원고들을 검토해보라는 말을 하더군요. 그래 책상을 뒤져 13-4년 전 담아놓은 디스켓 8개를 꺼냈습니다. 가까운 컴퓨터 수리점에 가서 USB로 옮겨 달라 했더니 주인이 작업하면서 놀라는 표정을 짓는 것입니다. 한 개도 깨지지 않고 그대로였어요.

 

오늘 그 시절 원고들을 죽 열어봤습니다. 어느 글에서 주인공이 연인이랑 나누는 대화 중 첫눈이 내릴 때까지 손톱의 봉숭아꽃물이 지워지지 않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 단락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당시 헤세의 <데미안>이 새롭게 번역되어 국내에 소개된다 했던 기억이 납니다. <데미안>이 원래는 <젊은날의 고뇌>로 번역되었지요.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는 부분... 헤세만큼 한국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작가도 없을 겁니다. 한번쯤 그에게 미쳐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알에서 벗어나려는 고통스런 투쟁을 강렬한 언어로 표현한 헤세의 매력에 흠뻑 취했었지요. 전혜린 님의 독일 유학 체험담에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中- 헤세와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부분에서 가슴 뛰던 기억도 나는군요.

 

공룡이 멸종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직립보행을 했을 거란 글도 있고, 아무튼 여러 생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3.5인치 디스켓 속에 제 한때의 삶이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네요. 거기엔 인터넷이니, 메일이니, 까페니, 댓글이니 하는 식상한 언어들이 한 자(字)도 없습니다.

 

훨씬 이전,

김수영, 신동엽, 김지하, 정태춘, 뚜아에무아, 헤세와 릴케, 조르즈 무스타키, 재니스 조플린, 레어나드 코헨, 헤리 벨라폰테, 버스표와 동전, 소주와 고추완자... 하루하루가 설렘으로 가득찼던 푸른날들이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