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Pen 혹은 文學

오지 삶을 꿈꾸며

펜과잉크 2009. 3. 30. 14:33

 

 

 

 

 

강원도 양구에서 인제와 원통으로 가는 중간에 광치령이 있다. 1980년대 초, 군인 신분으로 몇 번 광치령을 걸어 넘은 경험이 있는데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따로 없었다. 정상에서 원통으로 향하는 내리막 산 속에 민가 몇 채가 있던 기억……. 전부 화전민이었다. 아래로 걸으면서 논이 보이기도 했지만 빈약하기가 달팽이 눈썹 같은 꼴이었다. 한 번은 새벽에 광치령을 넘는데 어디서 소가 발정 났는지 ‘엉엉’ 우는 소리에 등골이 오싹했던 기억도 있다. 첩첩산중 오직 소울음소리만 들려왔던 것이다. 광치령 옛길을 지나본 사람이라면 정상에서 원통면소재지까지의 지루한 내리막길에 한번쯤 혀를 내두른 경험이 있으리라.

 

20년 후, 다시 그 길을 가게 됐다. 이번에는 차를 이용했다. 아들과 둘이 떠난 강원도 여행길에 양구 월명리 파라호반을 답사한 후 설악산으로 향하면서였다. 그런데 영(嶺)이 아니라 광치터널이었다. 과거 산을 넘던 길이 터널로 뚫려 수 분 동안 관통하면 끝이었다. 터널을 빠져나가 원통으로 가는 길가에도 듬성듬성 전원주택이 둥지를 튼 꼴이었다. 이런 형태는 진부령 정상에서 고성으로 향하는 계곡에서도 볼 수 있다. 당시 그곳은 청정 오지였음에도 요즘은 각양의 인가들이 들어서 있다.

 

오대산 정상의 비로봉 옆 산길을 통해 양양 갈천리로 가는 구룡령 기슭도 팬션 같은 상혼들로 가득하다. 며칠 현지에 묵으면서 8부 능선 위쪽으로 하얗게 쌓인 설경에 반했던 기억이 난다. 아래는 따스한 봄날임에도 산 정상엔 눈이 쌓여있었다. 그래 정상으로 정찰을 다녀온 후 군화를 벗어 모닥불에 말리는 수고를 더해야 했다. 어찌됐든 그곳은 지금 온갖 개발로 몸살을 앓는 중이다.

 

오지에 관심이 많은 내 입장에서 볼 때 국내 오지로 강원도 인제군과 양구군, 고성군내 각 몇 군데, 충남 청양군 칠갑산 주변 산촌, 충북 옥천군 산촌, 경북 울진군내 서너 군데로 압축된다. 가령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3리 인공폭포 삼거리에서 진부령 방향으로 가다가 좌측 개울의 다리를 건너 산 속으로 한참 들어가 만나게 되는 촌락 같은 마을을 보기 어려워진 것이다. 숲속 길에 물이 넘쳐 발목을 적시지 않으면 들어서기 힘든 마을이었다.

 

히말라야산맥 험준한 지형에는 현대 인공위성으로도 포착할 수 없는 오지가 여러 곳이라 한다. 오늘자 조선일보 지면에 구글의 스트리트뷰(Street View) 서비스 관련 기사가 실리면서 길거리서 소변보는 남성까지 포착할 수 있다고 나오지만 문명의 한계는 분명히 있기 마련이다. 그런 식이라면 남아시아 정글의 반정부 게릴라들은 왜 소탕하지 못하는가?

 

오지 삶을 꾀하는 사람들 지론에 이웃은 너무 멀어도, 지나치게 가까워도 안 좋다는 말이 있다. 자연에 깃든 사람으로서 만면 균형을 갖추기가 쉽지 않지만 운용의 묘로 현명한 삶을 누리고 싶다.

 

훗날,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살날을 그린다. 칠갑산중 혹은 고향 인근 소나무 숲을 다니며 산란(山蘭)이나 옮겨 가꾸련다. 각별한 사람이 오면 선사도 하고……. 때로 돈이 궁하면 팔기도 하면서 말이다. 나는 고향의 산란 군락지 여러 군데를 알고 있다. 고향집 어머니도 산란에 관심이 많은 분이다. 꽃이 필 때마다 전화를 걸어 아이처럼 좋아하시는 음성을 들으면 내 마음도 편해진다.

 

며칠 전 통화에서도 말씀하셨다.

“네가 지난번 와서 분갈이해놓고 간 것들은 전부 꽃이 피다가 시들어버린단다. 분갈이는 화분 하단에 마사토를 깔고 그 위에 배양토를 넣어 심어야 하는데 도시에서 온 너는 온통 마사토로만 이식했으니 기반이 튼튼할 수가 없지. 꽃이 온전하질 않아. 이번 주말에 오렴. 엄마가 산란 있는 곳을 또 한 군데 알아놨으니…….”

 

수 년 후, 내 삶은 오지에 깃들 것이다. 거기서 토종 자연인으로 살다 가련다. 두발 혹은 면도까지 강요하는 속세엔 더 이상 흥미를 잃었다. 안개 낀 아침부터 귀뚜라미 우는 저녁때까지 나만의 평화로운 땅에 살고 싶다.

 

 

 

 

2007년 11월 정선

 

 

 

 

 

 

 

 

'雜記 > Pen 혹은 文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첫사랑   (0) 2009.04.02
[스크랩] 원만한 경사의 깊은 계곡  (0) 2009.03.31
취중천국  (0) 2009.02.20
사랑하는 아들에게   (0) 2009.02.19
아버지   (0) 2009.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