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떨칠 수 없는 버릇 중 하나가 펜에 관한 집착이다. 수집해서 가지고 있는 것만 헤아려도 평생을 쓰고 남을 양이다. 이제 그만 마음을 비워도 될 성 싶은데 좀처럼 냉정할 수가 없다. 어딜 가서 문구점이 보이면 꼭 들어가 옛날 펜이 있는지를 묻는다. 오래된 문방구일수록 내가 찾는 펜을 만날 가능성이 높다. 신도시쪽보다는 옛날 산동네 같은 곳, 이를테면 송림동 골목의 아주 오래된 문방구라든가...
오늘 점심 때 주안3동 골목으로 차를 진입시키다가 간판이 허름한 문구점을 보았다. 후미진 골목의 처음 보는 문방구라서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빗속을 뛰어 문구점으로 들어갔다. 내 눈에 처음 들어온 건 파리채를 들고 앉은 칠순 노인과 노인 곁 검정색 전화기, 20년은 되었을 검정 몸체의 다이얼식이었다.
노인께 정중히 인사드리고 진열대를 보니 내 눈을 콕 찌르는 게 있었다. 다름 아닌 잉크를 찍어 쓰는 딥펜(dip pen)이었다. 우리 중학교 시절만 해도 영어 필기체 알파벳을 딥펜으로 연습했다. 그 때부터 딥펜은 내 삶과 함께 했다 해도 과언 아니다. 대전에서도, 부산에서도, 군대에서도, 서울에서도 오직 저 펜만을 썼던 것이다. 고요한 밤, 책상에 턱을 괴고 하루의 행적을 적노라면 매번 저 펜이 유일했다. 외출시엔 만년필이 따로 있었지만...
가격을 물으니 몽땅 4천원에 가져가란다. 5천원을 드리니 지폐 한장을 되돌려 주신다. 한편 죄송하고 겸언쩍어 낯이 뜨거웠다. 그 가격에 받아 나와 다시 봐도 이건 보물이 따로 없다. 곧장 추어탕집으로...
추어탕 한 그릇으로 점심을 때우고 사무실로 돌아와 펜 박스를 살폈다. 참 신기하다. 소중한 펜이여! 네가 임자를 만나기 위해 골방 같은 문구점 진열대에서 20년을 족히 보냈구나. 내가 수집한 딥펜은 대부분이 화신펜이다. 그런데 천자펜을 만나다니...
천자펜은 12개가 한 세트다.
딥펜의 뒷면
딥펜의 앞면
박스 밑면엔 영어와 한글로 자세한 사용법을 설명해놓았다. 'dip of ink'란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요즘 누가 저런 펜을 쓰겠는가. 그래도 내겐 한없이 소중한 펜이다.
밖엔 비가 내리고 시간은 자정으로 치닫는다. 10월의 마지막 밤을 비가 내린다. 문득 펜에 잉크를 묻혀 속필로 몇 자 쓰고 싶은 충동이 인다.
옛 메모
'雜記 > Pen 혹은 文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쟁과 만년필 (0) | 2009.11.05 |
---|---|
빈티지 파커45의 재발견 (0) | 2009.11.04 |
추석 (0) | 2009.10.04 |
가을 향기 (0) | 2009.09.10 |
조명다실 혹은 병무청 건너편 (0) | 2009.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