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입니다. 다들 뜻있는 시간들을 보내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오늘 야간 당직근무에 편성되어 미리 다녀왔습니다. 그저께 아들과 당일치기로 청양 칠갑산 선산의 아버지 산소 찾아뵙고 고향집까지 다녀왔습니다. 아내는 오늘 아침 아들과 고향으로 떠났습니다. 아내도 아버지부터 찾아뵙고 고향으로 향할 것입니다.
첫번째 사진은 그저께 아들과 청양에 들렀을 때입니다. 읍내 중형 마트에 들러 제주(祭酒)와 간소한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끼니가 지났으므로 읍내 단골 식당에 들렀습니다. 한전 청양지사 정문 앞에 있는 저 집은 육간 겸 식당인데 고기가 들어오는 날은 생간과 지라를 소금에 찍어 먹으라고 내줍니다. 그 맛이 참 고소하더군요. 저 집의 갈비탕 맛은 기막힐 정도입니다. 청양 읍내 <어울림> 식당입니다. 청양시외버스 터미널에서도 길 건너 60미터 정도 거리밖엔 안됩니다.
칠갑산 기슭 선산 아래 도로엔 눈이 쌓여 있습니다. 몇 년 전 직선도로가 뚫려 폐쇄됐지만 가끔 지역 주민들이 차를 운행하고 있습니다. 이륜 승용차로 진입했다간 온전히 빠져나오기 힘들 것입니다. 적설량이 예상 외로 많더군요. 게다가 커브길에 경사진 오르막 도로입니다.
도로변에 차를 주차시키고 내리자 인근 시골집의 개들이 나와 짖습니다. 저런 환경에서 사는 개들은 참 건강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청정지역이거든요.
개들의 생김새가 너구리 같습니다. 덩치도 너구리랑 비슷합니다. 경계를 풀고 발치에 다가와 물끄러미 바라보는 표정들이 어찌나 귀여운지 모르겠더군요. 마음으로는 번쩍 들어 한 번씩 깨물어주고 싶었습니다. 귀엽지요? 종자를 가늠조차 할 수없는 혼종으로 보이지만 영리해보이는 눈빛은 하나 다르지 않습니다.
조상님들 묘역은 도로에서 70미터 가량 올라야 합니다. 숲이 울창하여 눈이 별로 없더군요. 송림이 우거진 삼림에 폭설이 내리면 상당한 양이 나무 위에 쌓입니다.
묘역에도 눈이 쌓였습니다. 주변의 숲이 우거져 햇빛 드는 시간대가 짧아 눈이 쉽게 녹지 않습니다. 상석에 쌓인 눈이 이 지역에 내린 적설량을 짐작케 해줍니다.
제 앞의 왼쪽에 모셔진 분이 아버지이고, 오른쪽이 큰아버지 산소입니다. 윗편 묘역은 조상님들 산소인데 일기의 악조건으로 일일이 절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산중엔 여기저기 짐승 발자국도 많습니다. 저 산에 사는 짐승들은 참 행복할 것입니다. 최적의 환경일테니까요.
위에서 말씀드린 나뭇가지 위의 눈더미들입니다. 군데군데 저렇게 쌓입니다.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가지들이 뚝뚝 부러져 골짜기 메아리로 시골집 구들장까지 들려오던 먼 옛날의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눈더미가 갈참나무 숲으로 우수수 사태지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리곤 했지요. 형제들은 옹기종기 모여 윗방 둥가리의 날감자를 깎아먹거나 김장독 동치미를 퍼다 마시며 얘기꽃에 밤이 늦는 줄 몰랐습니다.
나뭇가지 군데군데 새집처럼 보이는 것들이 눈더미입니다.
산소를 내려오면서 도로쪽을 보고 찍었습니다. 저 길을 아버지 모시고 수없이 오르내렸는데 영원히 다시 뵐 수 없습니다. 제 나이 사십의 중반이 되어서도 고향집 갈 때마다 '어디 나가 어른들 뵈면 싸게 쫓아가 인사부텀 드려라' 되뇌이던 아버지 말씀이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 같았습니다. 어려서 저는 동네 어른들로부터 인사 잘하고 예절 바르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습니다. 어른을 뵈면 하루에도 몇 번씩 인사를 드렸지요. 지금은 인사까지 철저히 가려서 하는 심보로 변했습니다. 상대의 인사 받는 태도를 봐서 성의없다 판단되면 건성으로 해버리고 마니까요. 왠지 손해본다는 생각이 압도적인데, 이런 발상 자체가 객지 정서에 길들여져 삭막해진 결과라 믿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산 아래엔 산지기께서 육성한 버섯 재배장이 있습니다. 무슨 버섯을 재배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는 농업에 관한 지식이 전무합니다. 그쪽은 영 문외한입니다. 한때는 고향의 정서를 공유하고자 농협에서 발간하는 <농민신문>을 정기구독하기도 했으나 종내 실정을 익히기엔 무리였습니다.
아버지 산소 건너편엔 집 세 채가 있습니다. 왼편 밤나무 밭도 저희 소종중 땅입니다. 훗날 제가 저곳 어디에 집을 지을까 계획하고 있는데요, 이번에 보니 맨 윗집에 한우 비육장이 있더군요. 사진에 보이는 노랑색 가림막이 우사입니다. 그나마 소는 낫습니다만 어쨌거나 짐승이 있는 곳엔 날파리가 끓기 마련이고 환경이 오염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사를 보니 여러 생각이 갈래지더군요.
아버지를 뵙고 고향으로 가는 길입니다. 칠갑산 그늘에 묻힌 도로는 아직도 빙판입니다. 빙판길이 상당 구간 이어졌습니다. 왼쪽 개울에 참게가 서식하여 몇 군데 참게요리 간판을 내건 집들이 눈에 띱니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청정지역입니다.
거짓말처럼 눈이 녹은 양지도 보입니다. 일부러 차를 세우고 찍었습니다.
고향이 가까워질 무렵 밤나무 단지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제 고향은 온통 저렇게 밤나무로 가득차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자정 무렵 뒷산의 눈사태지는 소리도 들을 수 없습니다. 활엽수인 밤나무 앙상한 가지만이 황량함을 더해줄 뿐입니다.
고향집 안방에서 어머니 일기장을 봤습니다. 침대 아래 방바닥에 노트가 있길래 무엇이 적혔나 펼쳤다가 발견하고 찍었습니다. 어머니는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시는 중입니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 장문의 일기를 즐겨 쓰셨습니다. 저희 어릴 적에 받아쓰기 시험을 내시고 손바닥에 매질을 가하셨던 어머니는 이제 늙으셔서 칠십 중반의 몸으로 철자도 틀리고 맞춤법도 어긋나는 글을 쓰십니다. 일기도 메모 형식에 그칠 뿐입니다. 어린이처럼 매번 '오늘은...'으로 시작되는 문장이 보는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래도 바깥동네 예배당에 다니시고 마을 회관에 나가시어 마을 어른들과 환담도 나누시니 다행입니다.
제가 도착하기 전에도 글을 쓰셨군요. 볼펜이 떨어졌는지 굵은 사인펜으로 쓰셨습니다. 고향 가는 아들에게 문방구 연 데 있으면 사인펜 한 갑을 사다 드리라 해야겠어요. 몇 년 전에 앓으신 뇌졸증으로 기억력이 감퇴되고 판단력도 흐리시지만 수 십 년을 변함없이 해오신 일기만은 중단하고 싶지 않나 봅니다. 다시 보니 옛날과 필체가 많이 변하셨네요. 글씨를 참 잘 쓰셨는데...
아버지는 생전에 수양아들을 두셨습니다. 수양아들 조부님께서 손자를 꼭 수양아들로 받아달라시어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수락하셨지요. 아버지 돌아가시고도 수양아들 친부가 도리를 다 한다고 들었습니다. 저 역시 아버지 수양아들을 친동생 대하듯 해줍니다. 아버지께서 많이 귀여워 하셨거든요. 지금은 불쑥 청년이 되어 사법고시 준비중입니다. 친부는 충남도청 안병량 서기관이십니다. 아래 일기의 '수영 아들'은 수양아들의 어머니식 표기인 것입니다. 저희 어릴 적에 저런 오타를 범했으면 반드시 지청구를 하셨습니다. 지금 어머니 글을 보니 오타 투성이네요. 세월은 어쩔 수 없습니다.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저녁 밥상입니다. 밥상은 작지만 음식은 그토록 맛있을 수가 없더군요. 제가 기억하는 어린시절은 삼시 세끼가 분명했으며 반찬이 풍성했다는 점입니다. 먹다 남은 걸 다시 올리는 법이 없었지요. 그래서 사진에서처럼 늘 신선했습니다. 인천에 사는 저희집은 온통 플라스틱 반찬입니다. 뚜껑만 열었다 닫았다... 그런 식으로 며칠을 먹지요. 사람이 먹는 문제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도 불행입니다.
지금부터 만년필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청양 읍내에 오래된 문구점이 보여 들렀습니다. 언젠가 들렀을 때에도 만년필을 찾았으나 여종업원이 만년필을 제대로 알지 못해 그냥 나온 집이었습니다. 이번에 들리니 주인 아주머니와 둘이 일을 보더군요. 주인 아주머니께 '오래된 만년필'에 관해 물으니 몇 자루 있다시며 진열장 아래서 꺼내 보여주셨습니다. 아아, 제 눈을 번쩍 뜨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독일제 Rotex 만년필이었습니다. 저 만년필을 기억하실 분이 계시리라 믿습니다. 제 기억으로 중학교 2학년 때 읍내에 나갔다가 처음 저 만년필을 샀는데 당시 1,500원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1,500원이면 큰 돈이었지요. 1975년이었으니까요. 그 후 몇 번 저 만년필을 산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수입하지 않는 만년필이지만 한때 학생들에게 무척 인기있는 제품이었습니다. 그 만년필이 청양 읍내 오래된 문구점에 골동품처럼 숨어있었습니다. 사진속 제품들은 89년에 생산된 만년필로 추정됩니다. 'Super-Rotex'란 표기와 'MADE IN GERMANY'가 선명합니다. 모두 미사용품이고요.
"얼마씩이죠?"
아주머니께 물었습니다.
"한 자루에 O원씩 주세요."
"아, 예... 여기 있는 모두 다 사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집에 있는 Rotex 만년필 다섯자루를 몽땅 구입했습니다. 맨 오른쪽 만년필도 함께 구입했습니다. Parker 만년필인데 손이 작은 분께 아주 유용할 것 같더군요.
주안역 지하상가 대형 문구점에 가면 아직도 사진의 독일제 Rotex 만년필이 있습니다. 가격표에 67,000원이라 적혀 있습니다. 그곳에 들러 만년필을 가리키며 가격이 엄청 올랐다고 하자 사장님이 유로화가 인상될 걸 감안하면 오른 것도 아니라 하시더군요. 현실적으로 보면 그렇지만 제가 이번에 청양 읍내 문구점에서 구입한 Rotex 만년필 가격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격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다섯자루 만년필 중 한 자루는 제가 갖겠습니다. 또 한 자루는 최일화 선생님께 보내드리겠습니다. 설 연휴가 끝나면 곧바로 댁으로 부쳐드릴 예정입니다. 별도의 서간문을 동봉하지 않고 이 글로 갈음하오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최일화 선생님께 보내드리고 싶은 이유는 언젠가 인천문인 도서 전시회 때 본 최 선생님의 필체를 기억하는 까닭입니다.
아래 사진은 고(故) 이효윤 선생님 시집에 적혀있는 최일화 선생님 메모입니다. 글씨체를 가만히 보면 학생 시절 무척 학구파였으리란 짐작이 듭니다. 저 메모가 만년필 글씨였다면 더욱 신선한 발견이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최 선생님께 드리면 잘 길들여 쓰실 거란 믿음이 섭니다. 참고로 Rotex 만년필은 세필(細筆)로 길들이는 데까지 약간의 인내가 요구됩니다. 습관이나 필압(筆壓)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A4 용지 3장 정도만 쓰면 닙(nib)의 흐름이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자, 모두 여섯자루의 만년필 중 두 자루는 예약이 되었습니다. 네 자루가 남았습니다. 이 만년필은 인천문협 회원 중에서 의사 표시를 하시는 분께 무료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우체국 배송료도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주소는 쪽지로 알려주세요. 인천문협 회원인 경우 <仁川文壇>지(誌) 주소록을 참조하겠습니다. 잉크는 가까운 동네 문구점이나 대형 문구점에서 따로 구입하세요. 2,000-5,000원이면 만년필 전용 PILOT 잉크를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대형 문구점에서 판매하는 몽블랑, 쉐파, 워터맨, 파카 등의 잉크는 가격이 비싸고 제품에 따라 농도가 짙으나(ex : montblanc ink) 국산 빠이로트 잉크는 오랜 세월 만년필 전용으로 생산하여 색감부터 마음에 듭니다. 반드시 비싼 잉크가 좋은 잉크라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국산 Pilot BLUE-BLACK 잉크로 쓴 글씨. 자세가 불안정한 상태로 써서 필체가 악필입니다. 필체보다 국산 잉크의 오묘한 색감을 보시라고 올렸습니다.
사진의 만년필엔 스크레치 내지 기타 오염으로 추정되는 자국들이 보이나 융이나 극세사 천으로 닦으로 깨끗이 지워질 것들입니다. 참고로 맨 위의 Parker 만년필은 손이 작은 분께 갔으면 좋겠습니다. 만년필이 필요하신 인천문협 회원님은 계제에 주저없이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그림처럼 예쁜 Rotex 만년필로 글 많이 쓰십시오. 의사 표시는 반드시 댓글로 해주세요. 여러분의 설 명절이 풍요와 덕담으로 가득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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