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이 생각 저 생각

오디에 관한 회상

펜과잉크 2005. 6. 14. 11:35

 

오디라는 열매가 있다. 뽕나무 열매다. 뽕나무는 종류가 다양해서 시골 척박한 언덕에 자생하는 나무는 밑둥이 한아름 되는 것도 있다. 그 나무에 이마적 열리는 열매가 오디다. 농익은 오디는 달콤한 맛이 있어 아이들이 즐겨 먹었다.

 

낭창한 거목의 뽕나무에 몇이 올라 멸구(蟲)를 쫓으며 따먹는 오디는 정말 맛있었다. 어떤 아이는 빈속을 오디로 채우고 갈지자 걸음을 걷기도 했다. 농익어 발효된 오디 성분이 체내에서 분해되면서 별도의 행동양식을 지시하는 건 아닌지...

 

세월이 흘러 사람들이 배불러지자 오디도 차츰 잊혀져 갔다. 그저 어른들의 아련한 기억속에 한낱 추억거리로 잔재해 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실 요즘 뽕나무에 올라 오디를 따먹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러나 인습은 때로 묘한 향수를 자극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전기를 낳기도 한다.

 

최근 모 공중파 방송사에서 오디에 대한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오디는 하나의 상품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오디에다 보드카로 과실주를 담궈 60일 정도 숙성시킨 후 건데기를 건져낸 후 틈틈이 한 잔 두 잔 마시면 관절염 치료, 치매 예방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또한 시력이 좋아지며 흰머리가 현저히 줄어든다고 한다. 흰머리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없어진다는 학설이 나와 주목을 끈다. TV에서 나온 얘기다. 근거없는 얘기가 아닌 것이다.

 

어제 고향집 어머님과의 통화에서 신기한 사실 하나를 얻었다. 집 근처 뽕나무에 오디가 다닥다닥 열려 깔판을 깔아놓고 기다리면 저녁 무렵 상당히 많은 양의 열매를 걷을 수 있다고 하신다. 며칠 전엔 11Kg을 장에 가지고 나가셔서 7만5천원을 받았다고 하신다. 소매값은 훨씬 비싸다는 말씀이셨다.

"아니 오디를 장에 갖다가 파는 경우도 있었나요?"

"나두 사람들이 하두 말을 혀쌓아서 주사 맞으러 가는 길에 체면 무릅쓰고 들고 갔다가 그 돈을 받았어야. 세상이 별 걸 다 돈 주고 팔고 헌다니께..."

 

난 전화를 끊고 내둥 신기해 하다가 차를 몰고 신흥동 E-마트로 향했다. 그리고 네덜란드산(産) 보드카 10병과 30도 짜리 과실주 전용 소주 두 병(1병당 3.6L)을 샀다. 고향집으로 내려보내 오디주(酒)를 담글 목적에서였다. 내려보낼 것도 없다. 오늘이 당직이니 내일 아침 퇴근하면서 곧장 고향집으로 차를 몰면 된다.

 

오디술을 담아놓고 60일 후부터 한 잔 두 잔 마시고 싶다. 그러면 시력이 좋아지겠지? 흰머리도 없어질 거다. 어머님은 관절염에서 벗어나 뛰는 걸음으로 부락 마실을 다니실 것이다. 어릴 적에 몇 시간씩 매달려 따먹던 그 오디에 획기적인 성분들이 있는 줄 미처 몰랐다.

 

뽕잎을 따서 누에가 먹고 누에가 고치를 지어 번데기가 된 후 삶아져 입정거리로 씹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잠업(蠶業)이 성하던 시절엔 뽕밭 근처에 농약도 함부로 뿌리지 못했다. 독성에 노출된 뽕잎은 삽시간에 섶에 놓인 누에들을 몰살시켰다. 문득 누에를 잃고 흐느끼던 앞집 아녀자의 얼굴이 그려지누나. 뽕밭에 치마 걷고 엎드려 이대근의 뜨거운 입김에 자지러지던 이미숙의 표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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