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이 생각 저 생각

[스크랩] 담배에 관한 소고

펜과잉크 2006. 10. 10. 20:52

 

 

얼마 전,
추석을 맞아 고향 가서 우리 고향 두 번째 상전이신 정동현 선배 부친께서 치매증세로 고생하신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 그분 또한 얼마나 인자하신가? 평생 올바른 삶을 사셨기에 그 덕(德)이 자손들에게 미쳐 누구 하나 삐딱하게 사는 이들이 없다. 당대의 복은 곧 후손들에게 따르는 것이 하늘의 이치다. 단, 자손들이 부친의 건강을 염려한 나머지 흡연을 규제한다 하니, 나는 개인적으로 이 점만은 반대 입장이다. 늙은 어르신의 유일한 낙이란 담배를 피우는 것 또한 커다란 몫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담배가 의학적으로 백해무익하다는 데엔 이의가 없다. 그러나 우리네 삶은 과학이나 의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또 다른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 바로 인간의 정서라는 것이다. 오랜 세월 다져지고 길들여진 습관 같은 것 말이다.

 

아버지께선 하루 두 갑 혹은 세 갑의 담배를 피우신다. 경운기 운전을 하시면서 입으로 담배를 물고 계시다. 심지어 논에 들어가 고압 분무기로 농약을 뿌리실 때에도 담배를 피우신다. 낭창한 밤나무에 사다리 걸치고 곁순 고르기 작업을 하실 때에도 잊지 않으신다. 결코 좋을 리 없지만 난 그냥 아버지 하시는 대로 지켜만 본다. 만일 그 분이 기력이 쇠하셔서 혼자 판단하고 행동하기 어렵게 되셨을 때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면 어떻게 될까? 우리 코흘리개 시절부터 아버지 흡연문제를 두고 끊임없이 탓하시는 어머니의 불만은 오늘날까지 수 십 년 째 이어지지만 아버지의 흡연은 꿈쩍도 않으셨다.

 

하나의 예로 밤나무 밭에서 밤을 줍다보면 아버지는 늘 당신 혼자 저만치 떨어져 계시다. 어머니 몰래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다. 아버지께 있어 담배는 그야말로 육신의 시름과 마음의 티를 없애는 보약인 셈이다. 담배를 무시고도 칠순 중반이신 몸으로 40킬로그램이 넘는 밤 자루 마대를 번쩍 들어 경운기 짐짝에 올리시는 아버지….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가끔 아랫집 앞을 오가노라면 아까 그 어르신께서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시며 '나 담배 한 대만 주고 가게' 하신단다. 그 눈빛과 표정이 딱하고 애처로워 몰래 담배 한 대 드리면 또 그렇게 좋아하신다는 것이다.


나도 한때 맹렬한 애연가였지만 지금은 끊었다. 하지만 담배를 끊었다고 해서 아버지의 흡연까지 반대하고 싶진 않다. 아버지는 담배를 피우심으로 하여 또 다른 낙을 느끼실 것이기 때문이다. 평생 이 땅의 농부로 살아오신 존경하는 아버지…. 

 

내가 알기로 정동현 선배 형제 넷이 모두 담배를 피우지 않는 걸로 안다. 그러나 어르신 세대와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 다르다.《춘향전》에서 춘향 모친 월매가 뽕잎과 쑥을 썰어 연기를 피운다는 부분을 상기해 보라! 담배 아닌 뽕잎과 쑥이지만 나름대로 그 연기 맛에 얼마나 흡족했을 것인가? 인간의 삶은 각기 시대성에 맞게 진화되어 왔다. 방향이 빗나가는 듯 하지만 흡연을 즐겨하신 분껜 그 정서를 그대로 지속시켜줄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다.

 

그러고 보니 장인어른께서도 담배를 좋아하신다. 매번 뻑뻑 피우신다. 팔순을 내다보는 연세에도 말 안 듣는 암소 목을 쳐서 주저앉게 만들었다면서 마치 무슨 자랑처럼 말씀하시던 그분…. 두 분 모두 담배를 피우시거니 지금처럼 건강하신 몸으로 오래도록 당신들만의 삶을 사셨으면 좋겠다.

 

아쉽게도 이번 추석엔 아버지께 담배를 사다 드리지 못했다. 휴게소에선 인파에 밀려 엄두가 나지 않았고, 고향 근처 상점은 새벽이라 문을 닫은 탓이었다. 다음 고향 갈 때 잊지 않으리.

 


 

출처 : 내지리 시내버스
글쓴이 : 류삿갓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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