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고향 생각

지게

펜과잉크 2008. 1. 15. 19:14
 


 



지게의 사전적 의미는 뭘까? 간단히 말해 사람이 지고 짐을 운반하는 농구이다. 그 농구엔 별 걸 다 실을 수 있다. 쟁기, 가래, 서래, 풍구, 단지, 퇴비, 비료, 똥통, 볏단, 땔감 같은 일상의 것들을 비롯하여 잔칫집으로 가는 시루떡이나 초상집에서 주문한 돼지도 옮길 수 있는 지게다. 지게의 특징 중 괄목할만한 점은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은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깊은 산중이라 해도 사람이 갈 수 있는 한 지게도 간다. 가파른 길도 문제없다. 통나무 다리를 건너는 사람도 있다. 까짓 시간이 지체된다고 문제냐. 시간관념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 아침나절 산에 올라 저녁나절 무사히 돌아오면 되니까. 뒷산 오르막 숲길을 올라 능선을 타고 검산골을 지나 대양리 뒷산까지 가서 삭정이를 찍어오기엔 지게 없이 불가능하다.


지게는 성인용과 아동용이 따로 없어 어린애가 지게를 지기 위해선 멜빵 길이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지게다리 끄트머리 멜빵 종점 부분을 두 바퀴쯤 돌려 멜빵을 ‘타이트’하게 해가지고 지면 무난히 이동할 수 있겠다. 그러나 산에서 나뭇짐을 지고 올 때는 내리막을 조심해야만 한다. 미끄러운 토질이나 잔돌을 밟고 쭐떡 하는 날엔 보통 고역이 아니니 말이다. 쓰러진 나뭇짐 세우기가 여간 힘든 일인가? 내리막길에 지게다리가 채여 그야말로 공중돌기 하듯 지게랑 한 몸으로 동그라져 넋을 잃을 뻔한 적도 없지 않은 게 과거 추억이다.


우리 고향에서 산을 경계로 북쪽엔 새재라 불리는 조령리(鳥嶺里)와 백제광복군이 신라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전개한 나령리(羅嶺里)가 있고, 서북쪽으로 각대리가 있는데, 이 각대리 고개 넘어 광천으로 지게를 지고 다닌 어른들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김장철이 다가와 새우젓이 요긴해지면 어른들 몇이 지게를 지고 각대리 산을 넘어 만수산 계곡을 통해 광천까지 토굴 새우젓을 사러 갔다는 것이다. 아침 일찍 일렬로 산을 넘어 타관 준령과 평지와 내(川)와 들을 지나 광천으로 갔단다. 하긴 우리 고향엔 검산골 가재고개 넘어 홍산리와 가곡리를 통해 화산리 금광까지 통근했던 광부도 있었다.


지게는 담뱃잎 따서 건조장까지 나르는 일부터 고구마 캐다가 윗방 둥가리에 차곡차곡 들여놓을 적에도 없어선 안 되는 운송 수단이다. 지게는 솔가지 군불 감부터 왕겨 같은 나락까지 다 옮길 수 있다. 나뭇가지나 서까래 같은 짐이야 맨 지게에 척척 얹으면 되고, 왕겨는 씨알 빠진 쭉정이로 북성동 옥수수가루처럼 줄줄 새기 쉬워 싸리나무 바작에다 담고 가면 안전하다. 가끔 외양간 소 똥 덩어리를 비축하여 발효시킨 퇴비장 거름을 지게 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퇴비 거름은 주로 논바닥에 뿌리는 것이니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바닥에 듬성듬성 애장 봉분처럼 부려놓았다가 날 풀릴 때 가서 휘휘 저어 뿌리기도 했다.


우리 마을 최광순 형님이 감나무골 둔덕의 육중한 미루나무를 벨 적에도 지게 하나 달랑 지고 갔을 것이다. 톱으로 밑둥을 썰어 자빠트리는 순간에 몸만 살짝 비키면 될 것을 무슨 정신으로 나무 기우는 쪽으로 달리다가 수 십 갈래 가지에 벼락을 맞고 늑골까지 부러지는지, 원….


지게는 봄에 씨앗 뿌려 싹을 틔우고 북 주고 키워서 가을 나락으로 집에 올 때까지 농부 곁을 떠나지 않는다. 농부의 벗 지게! 문득 작대기로 지게다리 두드리며 부르던 노래 한 곡이 떠오른다.





새마을 내 고향

                  김상진



해당화 피는 내 고향

물새 우는 내 고향

굴을 따던 아낙네들

콧노래도 그리워라

어서 빨리 고향 가서

옛 친구들과 함께

초가지붕 걷어내고

우리 마을 새마을로

아름답게 단장하고

한 세상 나 여기 살리라!


해당화 피는 내 고향

인심 좋은 내 고향

소라 따던 아낙네들

콧노래도 그리워라

어서 빨리 고향 가서

옛 친구들과 함께

잡초 우거진 들판에

소를 몰고 논밭 갈아

풍년가를 부르면서

한 세상 나 여기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