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고향 생각

연초 마을 아가씨

펜과잉크 2008. 1. 30. 21:01

 

 

담배는 크게 버어리종 엽연초와 황색 연초로 나뉜다. 엽연초와 황색 연초는 경작 과정이 비슷하지만 가공 과정은 조금 다르다. 엽연초는 비닐하우스 속에서 태양열로 건조시키지만 황색 연초는 흙벽돌 건물 속에서 열기로 말린다. 황색 연초의 경우 탄(炭)을 물에 개어 삽으로 떠서 화덕 속에 고루 펼친 다음 불을 붙였는데, 화력이 대단히 뛰어나 담뱃잎이 잘 익었다.

 

담배 재배 농가에선 엽연초를 ‘말린다’, 황색 연초를 ‘찐다’는 말로 표현한다. 이처럼 건조 과정이 다르다. 그리하여 주로 황색종을 재배하는 충북 괴산이나 옥천 고을에 가면 담뱃잎을 쪄서 말리는 흙 벽돌집 건축물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충남 내륙 일원의 버어리종 재배 농가 주변엔 비닐하우스가 많았다. 우리 고향만 해도 어지간한 터엔 비닐하우스가 몇 동 씩 세워졌다. 우리 집은 한창 때 비닐하우스가 10동에 육박했다. 산말랭이 같은 곳은 건조장으로 최적이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담뱃잎이 고운 색으로 마르기 때문이었다. 잎이 다 마르면 한 다발 씩 잘 걷어 습기 없는 토광에 보관했다. 거기서 조리 시즌까지 있게 되는 것이다.

 

담배 공판은 이듬해 정월이었으므로, 그 안에 조리를 마치고 곽(槨)으로 틀을 잡아 규격으로 포장하면 끝이었다. 이제 공판장으로 실어 내 등급으로 매겨진 후 정부로부터 돈 타내는 일만 남았다. 그 돈에서 영농자금 이자 빚, 비료값, 농약대금 떼고 푼돈만 겨우 건지는 집도 있었으나 대개는 담배가 논농사 못지 않았다.

 

한창 바쁠 땐 이웃마을 아이들까지 몰려왔다. 담배 한 다발 엮어 50원 정도 받았으므로 돈이 궁한 아이들의 욕구를 자극했다. 그래도 아이들에겐 선택의 자유라도 있지만 우리 같은 재배 농가 자손들은 하루를 거를 수 없었다. 자정 넘어 모기 뜯겨가며 담배 엮는 날이 하루 이틀이었던가. 생활계획표를 그리라면 잠자고 밥 먹는 시간 빼곤 거의 담배에 붙어살았다. 온 동네 아이들이 담배 밭으로 내몰렸다. 그렇게 눈코 뜰 새 없던 농사도 하우스에서 걷어다가 광속에 보관하면서 조금 누그러졌다.

 

담배 조리를 할 땐 멀리 공주나 논산 사는 처녀들을 스카웃 해왔다. 이 시즌이 되면 산중 마을은 희망의 분위기로 바뀐다. 담배 조리는 해당 처녀들에게도 좋은 일거리였다. 한 달 동안 일하고 공장 월급 두 배 가량 받았으니 말이다. 며칠 간격으로 집을 옮겨가며 그 집의 빈방을 숙소로 이용하기도 했다.
“처녀들도 보셨을 테지만 이 동네는 막걸리 집두 �고, 담배 성냥 비누 파는 집두 �유. 가령 예를 들어 허리 고무줄 끊어지면 최소한 십 리는 가야 대체 용이 헌 송방 간판이 보일 정도니께유. 그러니 그렇게들 아시구 우리 집서 작업허실 적이는 우리 집서 주무시구, 저쪽 집이서 작업허실 적이는 저쪽 집이서 주무시면 돼유. 우리 집 건너방은 우풍(위풍=寒氣)이 �구 구들도 뜨뜻혀서 군불만 잘 넣으면 온 밤 내내 늘어지게 잘 수 있유. 문고리두 튼튼허구….”

 

처녀들의 출현은 건넌방보다도 고을 청년들을 설렘의 지경으로 이끌었다. 담배 조리 처녀들이 오는 철엔 고을 청년들 화두도 당연히 ‘처녀’들이었다. 처마 밑에서나 마실 방에서나 가리지 않았다.
“석성면 십자가리서 온 김복자인가 허는 아가씨는 갈치만 먹었나, 살결도 곱구 말여. 동공이 빛나는 게 삼백육십오일 생글생글헌 표정이더먼.”
“볼에 죽음깨가 수두룩허던디?”
“넌 벌써 거기까지 봤냐? 주근깨 없는 여자가 어딨어. 세상에 대패로 깎아놓은 여자는 �는 법이여. 죽음깨든 주근깨든 예절 바르구 상냥허믄 되는 것여.”
“윤진숙 이름의 여자는 방림방적에서 실밥 뽑다가 온 풍 같어. 구로공단 있을 적에 영등포 역전 다니다 보믄 엉덩이 큰 애들 되게 많았다니께. 뽀다구가 떨어져.”
“그렸어도 너랑은 안 맞어.”
“아무튼지 간에 작년에 온 아가씨들보다는 이뻐. 세련됐어. 올해두 누구 한 명 잘 혀서 풍악 울려 봐. 내가 속으루 열심히 빌어 줄테니께. 신령님두 도우실 거여.”
“자, 자…. 저녁 먹고 마실방이서 새끼 꼬면서 마저 얘기헙시다.”

 

실제로 남녀가 눈이 맞아 결혼하는 예도 있었다. 우리 고향에도 두 집이나 된다. 모두 금실 좋게 살아 환갑 넘도록 우환 한 번 없다. 자식 농사도 빛을 발하여 다들 건실하게 자라 튼튼한 직장에 있는 걸로 안다.

 

그 무렵, 나는 사춘기 소년이었다. 아아, 그 때 보았던 ‘누나’들은 왜 그리도 다들 예쁘고 고왔던가?
‘석양도 붉고 뒷간 다녀가는 누나들 볼도 붉구나. 허리는 또 오리목처럼 날씬하여라.’
혼자 방에 붙박혀 책을 읽으면서도 온 집안에 향이 감도는 듯 했던 시절이었다. 담배 조리 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노랫소리…. 그 해 공판장에서도 우리 고향이 최고점을 낙점 받아 영농자금 이자 빚, 비료값, 농약 대금을 떼고도 봉창 두둑이 돈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이다.

 

눈감으면 먼 옛날 고향집 담배 조리하는 방에서 ‘누나’들이 부르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해-당화 피고지이느-ㄴ 서-ㅁ마-을에
철새 따라- 왔다 간 총각 서언새앵니-ㅁ’
‘동-배-ㄱ 아가씨…. 멍이 들었소.’

 



 

 

'雜記 > 고향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원주택  (0) 2008.02.20
[스크랩] 금선이 누님  (0) 2008.02.17
쟁기질  (0) 2008.01.19
지게  (0) 2008.01.15
[스크랩] 화목 난로가 책을 읽는 남자의 정물  (0) 2007.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