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박익흥 시인’을 만났을 때 인천문협 재가입 문제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다. ‘박익흥 시인’은 회원 명단에서 제명당한 게 아주 섭섭한 눈치였다. 개인적으로 매우 각별하므로 지금부터는 존칭을 붙이기로 하겠다. 형님은 나보다 네 살이 많거니와 1990년 제1회 인천문단 대상을 수상하였고 이듬해 내가 제2회 대상을 수상하였다. 형님을 좋아하는 이유는 정결한 성품 때문이다. 외모도 잘 생겼지만 남자끼리 외모 얘기를 한다는 게 좀 그렇고, 아무튼 원만하고 합리적인 성품이 좋다.
형님을 처음 안 게 1991년경이니 얼추 18년 세월이 흘렀다. 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우리는 확고한 결정체로 뭉쳤다.『內港文學』이란 견고한 틀이 우리를 지탱해주었다. 정승렬 선배님을 비롯하여 장종권 정세훈 남인희 김인호 배진성…. 언뜻 떠오르는 이름만도 상당하다. 소설가 고(故)이재숙 씨도 어울렸다. 김영승 형님도 회원이었다.
지금처럼 온라인이 활발하지 않을 때라 사소한 토의에도 모임을 가졌다. 특히 친한 시인들끼리 자주 개별 모임을 가진 기억이 난다. 한 번은 장종권 형님, 박익흥 형님, 나 셋이 살코기 집에서 그야말로 ‘주태백’이 되도록 술을 마셨다. 하지만 한 번도 ‘품격’에 어긋나는 위신 실추 행동을 한 적이 없다. 술집에서 나와 곧장 집으로 향하거나 노래방으로 옮겨 여흥을 즐기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남자끼리 어울리며 ‘탬버린’ 같은 파트너를 부른 적도 없다.
아까 고(故) 이재숙 씨 얘기를 했는데 개인적으로 좋은 분으로 기억한다. 여럿이 학익동에서 술을 마시다가 내가 아는 지하 모던재즈 바로 데리고 갔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거북한 표정을 짓고는 그 얘기를 두고두고 꺼냈다.
“할렘가(街) 같은 델 좋아하나 봐요? 그런 데가 좋은가 보죠?”
되묻곤 했다.
한 번은 구월동「훼밍웨이」에서 술을 마시고 주안으로 옮겨 노래방에서 2차를 갖게 되었다. 그 자리엔 부평 사는 정세훈 형님도 있었다. 서울 광명에 사무실을 둔 인화출판사 이진산 사장도 합석했다. 그런데 정세훈 형님과 이진산 사장이 무슨 얘기를 나누다가 이진산 사장이 흐느껴 우는 게 아닌가? 세훈 형님의 억양 때문이었다. 형님은 평소 점잖고 평범했지만 옳고 그름에 대한 인식이 확고해서 한 번 주장하기 시작하면 절대 굽히는 법이 없었다. 상대의 대응이 적절하지 못하면 언제든 직격탄을 날리는 것이었다.
서구(西區) 살던 김인호 형님과 배진성 시인도 종종 만났다. 구월동에서 모였다가 자정 넘어 택시를 나눠 타고 배진성 시인 신혼집으로 몰려갔던 기억이 낯설지 않다. 배진성 시인은 처녀처럼 온순한 성격에 수줍음을 잘 타는 사람이었다. 그는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인데 개인적으로 굴곡이 많았다. 나에게 소상히 들려주었지만 이 자리에선 열거하지 않겠다. 한번은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다.
정세훈 형님도 뵙고 싶다. 작년 세모에 혼자 종로3가를 거닐다가 형님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는데 급한 용무로 나중에 전화를 드리기로 해놓고 깜빡 잊어버려 지금까지 연락을 못 하고 있다. 솔직히 휴대폰에 입력된 번호를 까먹었다. 때 묻지 않은 형님의 투명한 시어(詩語)들이 좋다. 강직함, 올곧음 같은 것….
본론으로 돌아가, 박익흥 형님은 내가 누구보다도 따랐던 분이다. 논리적이고 이해심 많은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배려심도 깊었다. 절대로 정도를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술을 마셔도 발걸음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하긴 다들 그랬다. 취기에 흥청대거나 경거망동하는 이가 없었다. 다만 이재숙 씨와 남인희 씨가 일촉즉발 대립하여 불안했지만….
고(故) 이병화 씨(前 인천시립병원장)가 인천문협 회장을 역임한 시절에 장종권 형님이 사무국장을, 박익흥 형님이 감사를 맡았었다. 두 분의 업무는 이병화 씨의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자연스레 막을 내렸다. 문제는 그 후 두 분의 활동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이었다. 물론 따로 활동하는 단체가 있긴 했지만 그건 누구나 비슷한 예였고, 아무튼 종전과는 현저히 좁혀진 입지였다.
시간이 지나 서동익 씨가 문협 지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서동익 씨는 나름대로 인천문협의 변혁(變革)을 꾀했던 분이다. 휴식 회원 제명문제까지 거론할 정도였으니. 결국 사업의 일환으로 일부 문인들을 가려내는 선별과정에서 장종권 박익흥 형님이 함께 조치되었다. 어쨌든 결과가 그랬다. 하지만 두 분을 잘 아는 나로선 여간 아쉬운 게 아니었다. 누가 뭐라 하든 인천문협을 이끌어갈 ‘일꾼’들 아닌가? 데미지는 예상외로 컸다. 자의든 타의든 전후 정세훈 김인호 배진성 시인이 떠나고 -이직(移職)으로 인한 탈퇴 포함- 남인희 시인이 작가회의로 옮겨갔다. 구월동을 중심으로 모였던 시인들 사이에도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세월이 흘렀을 때, 더 이상 예전의 친목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일순 터져 풍산된 봉숭아 씨처럼 다들 흩어지고 말았다. 장종권 정세훈 박익흥 김인호 배진성….『內港文學』은 고광식 최성민 시인 같은 신진들이 자리 잡으면서 정통성을 유지했지만 구월동을 중심으로 분연히 일어섰던 멤버들은 하나 둘 어깨를 떨군 채 사라져 갔다. 아아, 그 날이 언제였던가? 그 아름다웠던 날이.
마음이 아직도 충만할 때 내 소매에 떨어진
하얀 진주들
우리 서로 헤어졌다
난 그걸 가져간다
당신에 대한 추억인 양
<고금서>
『고슴도치의 우아함』뮈리엘 바르베리 著 김관오 옮김 도서출판 ‘아르테’ P160
오늘 오전에 인천문협 김윤식 회장께 전화를 드렸다. ‘박익흥 시인’ 가입 문제에 대해 말씀드릴 게 있었다. 김 회장님은 흔쾌히 수락하시며 지난번 이사회 때 결정된 안(案)대로 절차를 밟으면 될 거라 하셨다. 그렇다면 오는 3월 15일 총회 때 익흥 형님을 다시 뵐지도 모르겠다. 김 회장님과 통화를 끝내고 즉각 형님께 전화를 드려 3월 15일 총회에 꼭 나오시라 부탁 드렸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오실 걸로 기대하고 있다. 인천문협에 익흥 형님이 오시면 자리가 훤히 빛날 것이다.
과거의 회원들이 다시 왔으면 한다. 다른 문학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분들은 어쩔 수 없지만 어디에도 적을 두지 못하고 방게처럼 떠도는 분들이 있을 줄 믿는다. 그 분들이 돌아와 침체된 인천문협에 활력을 들이부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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