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Pen 혹은 文學

백석(白石)과 형제들

펜과잉크 2008. 2. 27. 22:57

 

 

 

설 하루 전,
고향집에서 밤늦도록 정담을 나눌 적에 나와 첫째아우와 셋째아우 셋이서 시인 백석(白石)을 얘기하게 되었다. 다들 술이 오른 상태로 백석이 북으로 넘어가 살며 쓴 ‘몇 편’의 시(詩)를 화두로 올렸다. 기존의 시풍과는 다른 문제의 ‘몇 편’을 놓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쓴 작품이라도 북쪽을 찬미한 이상 이데올리기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하자, 첫째아우가 오해를 했는지 ‘백석을 그런 식으로 평가해선 안 된다’면서 별채에서 책을 읽는 둘째아우를 의식하여 ‘전문가를 부르자’고 하는 것이었다. 전공이 같은 주제에 ‘전문가’ 소리를 하니 일순 아우에게 섭섭한 마음이 일었다. 결과적으로 형의 말을 신뢰할 수 없다는 뜻 아닌가? 내 발언에 오해의 소지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본뜻을 모를 리 없는 아우가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게 서운했다.

 

잠시 후 별채에서 건너온 둘째아우는 대화의 흐름만으로 ‘백석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어버렸다. 그래 나는 더 이상 설명할 가치가 없다 믿고 다음 화제로 말을 돌렸다. 사실 여러 출판사에서 백석의 시(詩)를 경쟁적으로 펴냈지만『시와사회』시집 -일일이 북관 사투리에 대한 설명을 붙임- 외엔 딱히 읽을 만한 책이 없었다. 백석을 겨냥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논문을 썼는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엄격히 따져 백석의 사망연도나 사인조차도 명백히 밝혀내지 못한 상태이다. 일부에선 북(北) 정권에 협조하지 않은 보복으로 숙청 당했다 하는가 하면 산골로 추방되어 쓸쓸히 여생을 마쳤다는 주장도 있다. 백석의 가족사진을 놓고 별의 별 추측과 예단을 내놓기도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1960년대 중반 사망설과 1990년 초 사망설이 대립했을 정도이니 백석에 대한 연구가 얼마나 미약한지 짐작이 간다.

 

둘째아우는 백석을 두둔하면서 설령 그가 이념에 물든 시(詩)를 썼다 할지라도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몸짓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이광수나 서정주 혹은 최정희 같은 문인들도 같은 방향으로 접근해가야 하지 않을까? 고(故) 모윤숙 씨가 생전에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길’이었다고 역설하였음에도 사람들은 그녀를 친일문인으로 몰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저들과 백석의 경우가 달리 평가되는 점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앞의 문인들과 백석을 동일선상에서 같은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다. 백석의 시(詩)를 지탱하고 있는 기조나 성향 따위들이 분명 저들과 같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딴은 양자를 극명히 구분 지을 특별한 명분 마련이 쉽지 않음 또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아무튼 앞으로도 백석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리라 믿는다. 개인적으로는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져 문학 분야 교류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있기를 고대한다. 백석이 말년을 보냈다는 ‘어느 산골’에 대한 연구까지 세부학적으로 이루어져 다시 한 번 그를 촘촘히 들여다볼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女僧 

                                  백 석

 

 


女僧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날같이 늙었다
나는 佛經처럼 서러워졌다

平安道의 어늬 山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山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山절의 마당귀에 女人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2008. 2. 27 밤  仁川文協   류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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