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시인에 관한 자료를 읽다 보면 그의 부친 얘기가 나온다. 신동엽 시인이 전주사범중학교 재학 시절 그의 부친이 부여에서 전주까지 자전거를 타고 아들을 만나러 가는 장면이다. 그것은 마치 한 편의 감동적인 영화처럼 내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부여에서 전주까지 보통 거리인가? 까마득히 펼쳐진 들판과 굽이진 고갯길, 금강을 건너 다시 멀고 먼 들판을 지나고 가파른 고개를 넘어 아들을 만나러 갔으리라. 신동엽 시인이 인병선 여사와 연애 시절 금강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보면 다시 한 번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게 된다. 군복 차림의 신동엽과 처녀 인병선이 강 건너 수북정(水北亭)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자리는 지금의 백제대교 아래 읍내 쪽 제방이다. 제방은 다름 아닌 사비성(‘土城’)의 줄기 아닌가. 부소산 7부 능선을 가로지른 토성은 *구드레 강나루를 지나 군수리 방향, 그러니까 KBS 부여중계소를 향해 뻗어 있는데 두 사람 서있는 지점이 토성 자락으로 강변 습지인 셈이다. 거기서 신동엽 시인의 생가(生家)는 5리가량 떨어져 있다. 아마 처녀 인병선이 휴가 나온 신동엽 시인을 따라 부여에 내려갔다가 찍지 않았나 싶다. 신동엽 시인의 군복 왼팔 어깨의 부대 마크가 경기도 연천에 있는 O군단인 바, 휴가를 나와 서울 혹은 수원에 들러 인병선과 함께 고향으로 동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일 두 사람은 같은 복장으로 낙화암(落花岩) 백화정(白花亭)에서도 사진을 찍었다. 집을 나와 강변 제방을 산책한 후 구드레 나루에 이르러 고란사 가는 동력선을 탔을 것으로 믿어진다. 먼저 부소산을 산책하고 고란사에서 배를 타고 내려왔을 가능성도 있으나 그렇다면 나루가 강 건너 규암이기 때문에 다시 읍내 쪽으로 건너는 불편함이 있어 가능성이 낮다. 곱게 한복을 입고 한 손에 양산을 쥔 처녀 인병선은 군인 신분의 반듯한 신동엽과 함께 걸으며 무슨 생각에 젖었을까?
1960년대 초반, 부여와 규암은 배를 통한 도강(渡江)만이 가능했다. 나루에 도착한 버스가 널처럼 생긴 거대한 굄목을 타고 배에 오르면 사공 몇이 힘을 합쳐 건너편으로 노를 저어나갔다. 철제 다리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가설(假設)이어서 거마는 통행할 수 없었다. 가끔 달구지가 보였지만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난간도 없어 요즘으로 따지면 군대 부교(浮橋)와 비교될 만한 시설이었다. 어머니 손잡고 건넌 어린 나는 철교 틈으로 내려다보이는 퍼런 강물에 오금 떨린 기억밖엔 없다. 다시는 건너고 싶지 않던 다리…. 그리하여 돌아갈 땐 버스를 타고 나룻배 도선(渡船)으로 강을 건넜다. 말하자면 신동엽 시인과 처녀 인병선이 서있는 지점은 규암 수북정에서 건너와 읍내로 진입하는 초입인 것이다. 공교롭게도 신동엽 시비(詩碑)는 그 지점에서 불과 지척의 거리에 세워져 있다. 신동엽 시비 건립에 관한 소문도 무성했던 걸로 안다. 신동엽 시인이 누구인가? 그에 대한 평가는 사망 직후만 해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정권에 협착하여 기생하는 무리들에게 신동엽 시인은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 결국 부소산 기슭을 비롯하여 몇 군데 부지 선정을 놓고 논란을 벌인 끝에 지금의 군수리 솔밭으로 결론지어졌다. 그 터는 사비토성의 돈대(墩臺)로 여겨지는 지형이나 정남향이 아닌 서북향이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인적과는 거리가 멀었고 여기저기 가축의 배설물이 뒹굴고 있었다. 가령 백사장 땅콩 밭을 쟁기질하는 소를 묶어놓는 그늘 휴식처밖에 안 되었으니 말이다. 부여가 낳은 시인을 꼽자면 정한모 박용래 신동엽 이재무 시인(출생順) 정도이다. 박용래 시인은 일부 강경 출생설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강경상고에서 수학했을 뿐 고향은 부여가 맞다. 그보다 조금 먼저 출생한 정한모 씨는 훗날 문교부장관을 역임한 바, 그를 군사독재정권 휘하에서 녹을 먹은 변절자로 혹평하는 이들과 내 입장 또한 별로 다르지 않다. 군화발로 쿠데타를 일으킨 정권에 의해 배려된 이른 바 충청 일원의 민심을 다독이는 ‘어용감투’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온건한 성품의 그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게 가혹할지 모르지만 결례라고 하기에 앞서 지난 행보에 관해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정한모 시인 역시 사후에 시비가 건립된 바, 부소산 아래 강변 조각공원에 있다. 박용래 시인 시비는 대전 보문산 사정공원 내에 건립된 것으로 안다. 본론으로 돌아가 신동엽 시인 작고 후 인병선 여사 혼자 자녀들을 키워 다들 재원으로 성장했다고 들었다. 아마도 인병선 여사가 부친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엄격한 집안의 아이들이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니 말이다. 인병선 여사도 정권의 부당함과 사회 비리에 맞서 활동하는 등의 다양한 발자취를 남겼다. 남편의 혼(魂)이 헛되지 않도록 노력한 흔적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산에 언덕에 신 동 엽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行人)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시집'아사녀',1963년> 흔히 충청도 사람들을 느려터진 심성으로 바라보곤 하는데 어떤 사안이든 단정적인 시각은 옳지 않다. 충청도 사람은 다른 지역 사람들처럼 흑백논리가 분명하진 않아도 그 안에 내재된 ‘은근과 끈기’만은 탁월하지 않을까 싶다. 함부로 깊은 속뜻을 내놓지 않는다. 일면 답답하다고 할 수 있으나 잘 보면 지피지기(知彼知己)의 지혜에 밝은 사람들이다. 또한 사안을 직설적으로 관찰하지 않고 대각이나 사각(死角)에서도 빗대어 풍자함으로써 위트와 해학의 기지에 능하다. 신동엽 시인을 중심으로 글을 쓺에 있어 이런 표현이 모호할지 모르지만 그의 시(詩)「껍데기는 가라」는 전자의 관점에서 볼 땐 가히 파격적이다. 시대를 앞서 진일보하는 쪽은 죽창이나 비수처럼 날 선 의식만이 아니라 *‘부드러운 직선’ 같은 선견지명도 필요하지 않나 싶다. 그렇다는 것을 강조하며 글을 맺는다.
* 구드레 : 부여 부소산 기슭 강나루 * 부드러운 직선 : 도종환 시(詩) 인용
들판에서 류 종 호 가슴을 열어 사람으로 부족함 없다 한 철이 이렇게 구김살 없이 호탕한 바람을 이끌고 와 박장대소하니 부족함 없다 들판을 흐르는 살여울에 맑게 빛나는 얼음장 위에 어린것들 썰매를 지쳐 재잘재잘 동무하며 하루를 지쳐 세상이 하나 부끄럽지 않다 누가 손찌검 하랴 누가 발길질 하랴 누가 등치고 누가 눈웃음치랴 어림없는 일, 이 들판에선 저 썩은 벼 포기들이 살얼음 새에 빼곡히 박혀 참혹한 기억들을 셈하며 들판에 몸 붙여 떠나지 않는데 오는 봄의 푸른 햇빛들 낱낱이 양지로 세워 세상 음지 속을 붉게 적셔 아랫목 따시함 같은 천년 세상 살얼음 쩡쩡 울리며 셈하고 있는데
* 2008. 02. 29 仁川文協 류종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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