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이 생각 저 생각

산정호수

펜과잉크 2008. 6. 7. 13:41

 

 

 

 

 

그저께, 차를 몰고 산정호수에 갔습니다. 의도적으로 향한 건 아니고요. 동북쪽으로 차를 몰다 보니 의정부 지나 포천, 다시 철원으로 향하게 됐습니다. 도중에 산정호수 이정표가 보여 대학 시절, 단체 여행 간 기억이 되살아나 반가운 마음에 차를 몰았지요. 포천에서도 50km 가량 가야 하더군요. 제 차엔 네비게이션이 없어 오직 이정표에 의존할 뿐이었습니다. 

 

산정호수 입구에 팬션들이 많더군요. 호수는 거기서도 좀 들어가야 합니다. 산길을 달려 끝까지 갔더니 포장이 끊기고 황토 길로 이어졌습니다. 차를 U턴하여 나오다가 깔끔한 식당에서 끼니를 때웠습니다. 그리고 호숫가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이런저런 상념에 젖었지요. 가로등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호수에서 두 시간 가량 체류했을 겁니다. 밤 열시 조금 넘어 출발했으니까요.

 

그런데 오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갈림길에서 직진했더니 삼십분을 달려도 아무 것이 없더군요. 탱크 장애물만이 전방 현지임을 암시할 뿐이었습니다. 불빛 하나 안 보였어요. 산 돌면 있으려니, 영 넘으면 보이려니 했던 불빛이 없었습니다. 산간도로에서 U턴 하자니 겁이 나더군요. 뒤 차창 밖에 귀신이 서 있는 환상도 들고요. 갑자기 시동이 꺼지면 어쩌나 싶자 심장이 콩콩 뛰었습니다. 다행히 유량계 바늘이 여유로워 조금 위안이 됐어요.

 

삼거리로 나와 다른 길로 접어들자 거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리 가도 불빛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불빛'이라 함은 가로등 말고 민가 주둔지를 뜻합니다. 사실 오지에서 길을 잃으면 혼선이 따릅니다.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산정호수 입구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어요. 오던 길로 돌아 나갔지요. 가까스로 숲속 불빛을 찾아 들어가니 토속박물관 같은 건물에 남자 두 명이 있었습니다.

"인천 사람입니다. 나가는 길을 알고 싶어요."

그러자 제 쪽에 있던 남자가 지리를 아주 자세히 알려줬습니다. 산정호수로 향하다가 만나는 삼거리에서 서울 이정표를 따라 우회전 하랍니다. 거기서 조금만 달리면 나오는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곧장 4차선이니 무조건 서울쪽으로 달리라는 겁니다. 조금만 달리면 서울이 나온다더군요.

 

저는 '조금만 달리면'이란 남자의 말에 위안을 삼고 명성산 중턱 삼거리에서 서울 이정표 따라 우회전을 했습니다. 가끔 가로등만이 보일 뿐 민가 불빛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제법 직진을 하자 '여우재'라는 고개가 나오더군요. 길이 아주 난코스였습니다. 그런데 굽이길을 한참 내려가도 남자의 '조금만 달리면' 나온다는 삼거리가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무슨 도깨비에게 홀린 것 같기도 하고 순간 멍해지더군요. 20-30대 시절의 패기와 자신감과는 거리가 먼 한낱 쑤세미 꼴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왕 더 가보자 했던 끝 마장에 삼거리가 나타나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며 4차선 도로를 탈 수 있었습니다. 서울까지 70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보이더군요.

 

4차선 도로는 서울 퇴계원과 닿아 있었습니다. 초입에서 서울 외곽고속도로를 만나 의정부 쪽으로 틀어 사패터널과 김포대교를 건너왔습니다만... 사실 기분이 좀 그렇대요. 깜깜한 밤에 혼자 산속에서 겪은 당혹감이라는 게 말입니다. 물론 낮이었다면 그러지 않았겠지요.

 

문득 과거 강원도 첩첩산중 외딴집에서 경험한 일이 새롭습니다. 집주인이 화전민이었는데요. 외롭지 않냐고 물으니 머리를 저으며 밤에 이웃집 마실을 다닌다는 대답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위에 이웃집은 없었지요. 그가 말하는 이웃집은 고개를 넘어 마을쪽으로 한참 나와서야 만나는 또다른 외딴집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일반 우리가 인식하는 '이웃'과 강원도 첩첩산골에서의 '이웃'은 그 개념이 달랐건 거지요. 결국 그저께 밤의 남자가 설명해준 '조금만 가면'도 과거 화전민의 '이웃' 개념과 유사하지 않을까요?

 

언제 시간 내어 아들을 데리고 낮에 여유로운 산정호수 여행을 즐겨볼까 합니다. 이번엔 사전 준비가 안된 여행이었거든요. 휴대폰을 끄고 무작정 운전대 잡고 향한 길이었습니다. 돌아오다가 카메라에 담은 산정호수 사진들을 모두 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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