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 근무 중 잊지 못할 경험을 했습니다. 112 지령실 무전기에서 열 한 살 초등학생이 공중전화기로 112에 전화를 걸어 '엄마가 집을 나갔다'면서 운다는 것입니다. 지령실 직원이 다른 가족이 있느냐 물으니 아이는 '엄마가 집을 나갔다'라는 말만 반복하면서 운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슴이 아프더군요.
'엄마' 혹은 '어머니'...
제 어린시절을 회상하면 엄마 없이는 한 시도 살 수가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와 울안에 서며 '엄마' 부를 때 '응' 소리가 나면 그렇게 기쁠 수 없었어요. 엄마는 먼 길 온 아들에게 풍요로운 밥상을 차려 주셨지요. 일철엔 집이 비어 있을 때가 많았는데요. 그런 날은 밥을 먹으면서도 통 신명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래 후딱 수저를 놓고 밭으로 뛰었어요. 엄마를 찾아서요. 밭을 향해 큰소리로 '엄마' 하고 부르면 어디선가 '응' 하셨습니다.
"엄마~, 어디야?"
"담배 따는 중이란다."
"내가 갈까?"
"거기 있어. 금방 나갈게."
저는 밭고랑 끝자락에서 돌멩이를 던지거나 공기놀이를 하며 엄마가 보이기만을 기다렸지요. 잠시 후 엄마는 활짝 웃으며 오셨습니다.
"받아쓰기 잘 했어?"
"90점이야."
"다음엔 100점 맞거라!"
엄마는 어린 내 등을 가만히 두드려 주셨지요.
엄마가 장에 가시면 설레임과 두려움이 교차하곤 했습니다. 해가 서녘으로 향하면 수시로 문 밖을 내다봤지요. 가끔 울며 보채는 어린 누이동생을 업고 동구 밖까지 마중을 나가기도 했습니다. 동생들까지 따라 고개마루에 올라 저 아래 모퉁이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보일 때마다 '엄마일까?'하며 눈이 동그랗게 커졌습니다. 그러다가 가까이 와서 엄마가 아니면 마음이 심란해졌습니다. 용기를 내어 '혹시 우리 엄마 보셨나요?' 묻기도 했어요.
마침내 저만치 엄마 오시는 게 보이면 모두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그때 쯤이면 등에 업힌 누이동생도 울지 않았습니다.
"엄마 온다!"
제가 소리치면 형을 따라 나온 코흘리개 동생들이 '우~' 엄마를 향해 뛰어갔습니다. 강아지들처럼 일제히 품에 안겼습니다. 엄마는 집으로 향하시며 학교에서의 일을 물으셨고, 빨래 걷었느냐, 닭 모이 줬느냐, 쥐덫 조심했느냐, 물독을 채웠느냐 세심히 물으셨습니다.
제 등에 업혀 코를 묻히곤 했던 여동생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 일 가신 집에 홀로 남아 수제비를 끓여 부모님을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요즘도 어머니께서 그 말씀을 하세요.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애호박까지 썰어 수제비를 끓였더랍니다. 어머니는 여동생을 참 예뻐하셨는데 손수 뜨게질옷을 해 입혀 인형 같은 모습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다들 커서 어른이 됐지요.
어젯밤, 공중전화기에 매달려 운다는 아이 얘기를 듣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꿈 같았던 제 열 한 살 시절이 떠올라서요. 그때는 정말 '엄마' 없이 살 수 없었습니다. 돌아보면 마냥 행복했어요. 저는 나름대로 세상 사람들이 부모로서의 책임에 충실하다면 밤에 112에 전화를 걸어 우는 '어린 것'도 없을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112에 전화를 걸어 운들 112가 어찌하겠습니까? 그 아이의 불행마저 해결해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왜 가장 기본이 되는 가족 구성체마저 온전히 지탱하지 못할까요? 오늘 밤 아이는 잘 지낼지.... 생각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