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다가왔다. 옛날엔 이맘때면 마을 청년회가 바삐 움직였다. 추석절 콩굴대회를 위해서였다. 격년 혹은 3-4년씩에 한 번 열리는 콩굴대회는 마을사람들을 비롯하여 인근 마을까지 설레이게 만들었다. 콩굴대회를 위해 몇 달씩 연습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령 검산골 규중처자(閨中處子)는 동갑의 이웃 처자와 함께 마을 뒷산 투구봉에 올라 몇 시간씩 은방울자매나 펄시스터즈 창법을 뽑아내곤 했다. 그들이 서울 방송국으로 진출할 거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추절 콩굴대회를 준비하는 것이다.
추석을 열흘 정도 앞둔 시점에서 마을 청년회는 부산히 움직였다. 대회를 알리기 위한 작업에 임해야 했다. 마을회관 앞에 모이면 각자 역할 분담에 들어갔다. 2인 1조로 방문(榜文)과 풀통을 지급받았다.
"풀통 엎어지지 않게 조심허란 말여. 자전거 타고 온, 그건 너... 병모 쟤는 제일 가차이 사는 놈이 꼴찌로 나타나가지고는 귓창 시끄럽게 지랄이네. 얀마, 담뱃붙 끄고 여기 말 좀 들어봐."
그러면서 요구사항과 주의사항이 전파됐다.
방문은 면사무소 소재지부터 동서남북 고을마다 빼놓지 않고 붙였다. 바람에 떨어지거나 어린애들이 똥 묻혀놓기 위험한 곳을 피해 확실히 붙여야 하는 것이다. 방문이라는 게 요즘처럼 초안을 잡아 복사기로 다량 뽑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 장 한 장 매직이나 먹물로 써서 완성할 수 밖에 없었다.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았다.
----- 제10회 둔터골 콩굴대회 ------
금년 추석을 맞이하야 아래와 같이 콩굴대회를 개최함!
1. 일시 : 1) 예심 - 2010. 9. 21~22(2일간)
2) 본심 - 2010. 9. 23일
2. 장소 : 은산면 둔터골 마을회관 광장 특설무대
3. 상품 : 1위 1명 - 순금 닷돈냥
2위 2명 - 괘종시계 각 1대
3위 3명 - 손재봉틀 각 1대
그 외 입상자 - 소정의 상품 다수
4. 기타 : 우수 밴드 초청함
제10회 둔터골 콩굴대회 추진위원회
둔터골 마을청년회회원 일동
둔터골 마을이장 이 정 구
둔터골 부녀회장 황 갑 순 올림
콩굴대회는 예심부터 성황이었다. 사회는 둔터골* 청년회 총무 이창구가 맡았다. 그는 군대 가려는 1급 갑종처럼 머리를 깎아 없앤 처지라 언뜻 보면 건달 같았지만 나름대로 말발이 서는 젊은이였다. 초청 밴드는 이번에도 읍내 전파사집 맹인 아들 악사였다. 여섯줄짜리 통기타아를 아주 잘 뜯는 실력이었다. 마이크를 기타아 울림통에 집어넣고 연주하면 음향기기 전자 기타아가 무색했다. 한 음 뜯을 때마다 둔터골 밤하늘에 '퉁' 울려퍼졌으니... 한편 부락의 청년들과 타부락 청년들은 평소 갈고 닦은 실력을 뽐내느라 여념 없었다. 청년들은 주로 나훈아, 배호, 남진의 대표곡을 즐겨 불렀고, -박일남의 <갈대의 순정>도 빠지지 않음- 처자들은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 <먼데서 오신 손님> 혹은 이미자의 <영산포 아가씨> <호동왕자> <노을이 타는데> <흑산도 아가씨>같은 곡을 선호했다.
사회자 이창구는 예쁜 처자가 등장할 때마다 그냥 건너뛰는 법이 없었다.
"이번 무대 오르신 분은 가중리 갓골서 오셨쥬? 사철 팔랑개비 돌아가는 함석집 근처 지나가며 뵌 것 같습니다아."
"예에, 그 집 살아유."
"혼자 서낭댕이고개 넘어 왔남유?"
"저희 가중리 4H 오빠들이랑 함께 왔유."
"부르실 곡은유?"
"하춘화에 물새 한 마리..."
그런 식으로 예심이 지나고 본심의 날은 그야말로 진정한 실력자를 가리게 된다. 하지만 어찌된 게 노래 잘하는 사람이 금 돈냥을 타는 걸 보지 못했다. 타동네서 온 사람은 아무리 노래를 잘해도 1위가 될 수 없었다. 1위는 사전에 이미 예약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둔터골 콩굴대회에 가장 많이 협찬을 한 임재중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노래 실력이 엉터리였지만 찬조금을 많이 낸 대가로 1위가 되었다. 당연히 타동네서 온 사람들의 불만이 이어졌다. 객석 어둠 속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에이, 씨발... 작년에도 이런 식이더니 올해도 여전허구먼. 이 동네는 새마을 우수 부락으로 군수 표창까지 받았다면서 양심은 죄다 헛것들인 모양여. 금 닷돈이랑 괘종시계는 어디 갔어? 누가 타는 거여?"
그럴 것 같으면 또 이쪽에도 대등한 사람이 나타났다.
"돈 닷돈이랑 괘종시계는 내일이라도 우리끼리 수여헐테니께 당신들은 당신들 지정 상품이나 타고 가란 말이여."
그래 3위 손재봉틀까지 어물쩍 넘어가고 플라스틱 바가지 세트에 빨래비누 두 장을 끼워 주는 걸로 수여식을 마쳤다. 애초부터 그렇게 계획된 거였다. 사실 둔터골 청년회가 무슨 재주로 금 닷돈냥을 1위 상품으로 내걸겠는가. 말도 안된다. 그러니 결국 '그 외 입상자'들은 끝물 수박 한 통씩 나눠 받는 걸로 족해야 했다. 고을 어른들은 담뱃대만 주전부리마냥 빨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마을회관 분위기는 좀 더 마을 청년들과 타동네 청년들 설전으로 이어졌다. 그래봤자 상황이 뒤집어지는 예는 없었다. 특설무대 기둥뿌리를 뽑아내도 금 닷돈냥은 애초부터 준비되지 않은 거였다. 단순히 콩굴대회의 성공 개최를 염두에 둔 둔터골 청년의 발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을 뒤늦게 알아버린 타동네 청년들은 저마다 분개하는 투였다.
"내가 여기 오려고 이발소 들러 포마드 바르고 양복도 빌려 다려입고 말표 구두약에... 무대 오를 때 참가비를 1만원이나 냈는데 겨우 수박 한 통이란 말여. 썅~. 다음에 우리 동네 콩굴대회에만 와 봐. 도굿대로 대갈빡을 한 방씩..."
이를 득득 갈았다. 그러나 플라스틱 바가지 세트 외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깨달은 타동네 청년들은 저희끼리 수런대며 달빛 속으로 멀어졌다. 더러 마을 초입 4H 표지석 앞에 수박을 깨뜨려 살점을 골라 먹고 버리고 간 무리도 있었다.
눈 감으면 먼 옛날 고향의 콩굴대회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임재중 청년같이 출중한 실력이 아니어도 밤하늘로 마이크를 올려잡고 혼을 토하던 모습들... 읍내 전파사집 아들 맹인 악사의 여섯줄 기타아에 맞춰 노래하던 영혼들이 떠오른다. 폼만은 일류 나훈아가 무색했다.
사랑해 사랑해요
당신을 당신만을
이 생명 다 바쳐서 이 한 목숨 다 바쳐
내 진정 당신을 사랑해
가지마오 가지마오
나를 두고 가지를 마오
이대로 영원토록 한백년 살고파요
나를 두고 가지를 마오
사랑해 사랑해요
당신을 당신만을
이 생명 다 바쳐서 이 한 목숨 다 바쳐
내 진정 당신을 사랑해
가지마오 가지마오
정을 두고 가지를 마오
이대로 영원토록 한백년 살고파요
정을 두고 가지를 마오 나훈아 <가지마오> 전문
* 둔터골 : 필자 고향의 고유 지명으로
백제시대 '백제군병들이 주둔했던 터'에서 유래됨.
진칠 둔(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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