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7일, 청양 칠갑산 선산에 갔다가 본 풍경이다. 아버지 산소 아래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보니 건너편 야산 중턱에 누군가 집을 짓는 중이었다. 청양읍에서 2.5미터 가량 떨어진 지점이다. 정남향의 완만한 형세라 집 짓기에 최적이라는 생각을 평소에도 하던 차였다. 신축 가옥 왼편 밤나무밭은 우리땅으로 훗날 아버지 산소가 올려다 보이는 저곳에 집을 지을까 생각중이지만 진입로를 확보하려면 도로와 밤나무밭 사이 60평 가량의 논을 매입해야 한다. 주인이 팔지 않으면 산지기 어른댁 진입로를 경유하는 수밖에 없다. 집을 짓는다는 전제로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사진엔 부수적인 건조물만 일부 나왔는데 아래 사진 오른편의 비닐하우스가 산지기 어른댁이다. 흔히 문중의 사람들이 선산 관리를 맡아주는 산지기를 경시하는 풍조가 있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발상이다. 요즘 세상에 살림이 궁핍하여 남의 선산과 묘역을 관리해주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오랜 세월 다져온 인정의 결과로 어쩔 수없이 맡는 경우가 흔하다. 나는 선산에 들릴 적마다 음료수나 차(茶) 세트 같은 걸 산지기 어른께 드린다. 그 분은 우리 선산 골짝에 조그만 규모의 버섯 육종장 운영과 위에서 말한 밤나무밭 경작을 조건으로 벌초를 담당하시고 시제 음식을 장만해주신다. 하지만 아버지 산소와 큰아버지 산소만은 우리가 직접 벌초하겠노라 말씀드렸다.
작년 시제 때 산지기 어른이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조상님들 산소 봉분 옆에 몇 군데 꿩이 알을 까고 부화한 흔적이 보였다. 볕이 잘 들고 안전한 곳을 찾는 꿩들의 감각으로 볼 때 복받은 땅이라 말씀하시어 속으로 기분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 분은 한때 청양군 무슨 관변단체장까지 역임한 경력으로 자손들이 성장하여 다들 서울에 산다고 들었다. 내가 언젠가 그 분께 인사하다가 들은 이야기가 있어 기억나는대로 옮긴다.
"바쁜 내 몸이 오랜 세월 당신네 선산과 조상 묘역을 관리해주는 건 당신네 전주류씨(全州柳氏)들의 바른 예절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새삼 다지게 된 바도 있지만, 어쩌면 나도 이 직업만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겸손하고 예의 바른 사람일거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러는 나도 자식에게만큼은 입이 닳도록 인사성에 대해 되뇌인다.
'이웃 어른을 뵈면 공손히 인사부터 하렴. 슈퍼에 가도 세탁소에 가도 잊지 마라.'
나도 할머니와 아버지로부터 수없이 들어왔다.
굳이 현재 삶을 개[犬]에 비유한다면 진돗개에 버금가지 않을까 싶다. 시골서 태어나 구릉야지를 마다않고 뛰놀던 몸이 목줄 같은 도시생활에 얽매어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 없다. 이 생활 자체가 마음의 병을 키웠다. 바로 향수병이다. 오매불망 그리운 고향 때문에 내 삶이 온전하지 못하다. 비록 먹고사는 환경에 지금껏 이러고 있지만 언제든 돌아가고픈 곳이다. 아마도 동물적 귀소본능이 아닐까 싶다.
내 본향은 원래 청양군이다. 조선 후기 중앙 요직에 있던 할아버지가 말년에 정착하신 곳이 대치면 오룡리다. 지금도 집터가 있다. 할아버지는 면천복씨(沔川卜氏)를 배우자로 맞으셨는데 훗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가 친정 혈육들에게 소유지를 분할하시어 상당수의 전답이 복씨들 명의로 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믿는다. 할머니도 우리 조상이니... 다 그렇게 저렇게 사는 세상인 것이다.
내 고향이 부여인 건 할아버지가 전주이씨(全州李氏) 집안에 데릴사위로 가면서부터다. 할머니는 같은 동네로 분가하시면서 산의 일부와 전답을 물려받았는데 훗날 논 30마지기와 밭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땅을 친정에 돌려주게 된다. 하나뿐인 남동생이 돌아가시면서 시누이와 상속분쟁이 벌어졌는데 조카(돌아가신 남동생의 아들)가 면사무소 총무계장으로 있어 달리 도리가 없었다.
아무튼 집안 어른들은 나더러 오룡리 할아버지 사시던 집터에 정착하라 귀뜸하신다. 문제는 아버지 산소와 3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관심이 미치지 않는 않는 이유가 바로 그 점이다. 내 욕심은 가급적 아버지 산소 맞은편에 터를 잡고 싶다. 그리하여 훗날 마침내 길 건너 앞산 부모님 산소 아래 잠들고 싶은 것이다. 결국 위 사진의 어느 곳에 터를 잡지 않을까 점쳐진다.
집은 안채에 방 2-3칸이 있는 아담한 1층이 될 것이다. 별채는 평소 비워두되 자식들이 오거나 손님 맞을 때 불을 넣는다. 안채 거실엔 재래식 미군난로를 놓아 겨울이면 주전자물을 끓이고 연통에 타올이나 행주를 널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 화목에 의존하려면 장작도 준비해야 한다. 뒷산에 삭정이가 널부러졌을 것이다. 따라서 난로에서 재를 비우려면 삼발이 밑에 철제 깔판도 깔아야 한다. 이런 점을 항상 유념하고 있다. 난로 깔판은 화력이 셀 때 물을 뿌려 실내가 건조되는 걸 막는 기능도 겸한다.
산야초림에 묻혀 밀파된 고정간첩처럼 조용히 살다가 죽는 게 복이다. 문을 열면 맑은 공기가 밀려 들어오고 뒷산에 짐승들이 뛰노는 곳... 기껏 읍내 나가 비누 혹은 설탕이나 사오고 산봉우리 올라 트럼펫을 불며 지내련다. 가능하면 차도 인터넷도 신사복도 없애버리겠다. 어느 이름없는 사람으로 조용히 사는 게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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