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문학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저자 조세희 님은 강원도 사북과 고한 일원의 원초적 삶을 카메라에 담아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문학 외 사진 분야의 탁월한 면을
부각시킨 바 있지만 개인적으로 아우의 수배시절 한때 삶이 물들어있는 탄광촌의 비애를 한눈에 보는 것 같아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도 하였다.
요즘 사진작가들의 사진을 보면 연출된 것들이 거반이다. 좋은 예로
평창이나 정선의 섶다리를 건너오는 농부라든가 아동들의 모습은 거의 조작 연출된 것들이다. 지게에 가래를 얹어 지고 일터에서 돌아오는 길의 섶다리
농부 옷차림이 금방 장롱에서 꺼낸 듯한 깨끗한 한복 차림이라면 그 사진에 과연 인간적인 감동이 일겠는가?
며칠 전에도 신문에 섶다리 사진이 실린 적이 있는데 작가의 작품이라는
사진이 연출로 가득해보여 매우 실망스러웠다. 일가족으로 보이는 5-6명이 한 줄로 서서 섶다리를 건너오는 장면이었는데 맨 앞에 가장이 지게를
지고 그 뒤를 부인인 듯한 여성이 머리에 채반 비슷한 걸 이고, 첫째가 주전자를 들고 뒤를 따르고, 그 뒤를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걸어오는
아이들의 표정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한결같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자세여서 사진으로써의 가치를 상실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현대 사진작가들이 연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부산을 배경으로 이어지는 최민식 선생님의 사진은 삶 그 자체를 포커스에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사진을 요즘
작가들이 건져낼 수 있을까? 혹시 요즘 작가들은 삶의 일면이 여과없이 투영되는 사실성을 무시한 채 단지 의도만으로 작품을 연출하는 안이함에
젖어있는 건 아닌지... 그렇다면 그건 치열한 작가정신에 위배된다.
아래 사진을 잘 보라. 저 사진은 연출되었음이 분명하다. 일터로
가거나 일터에서 돌아오는 농부들의 옷차림이 한결같이 한복차림이다. 피사체의 간격이 사전에 모의된 양 적당한 간격으로 배열된 것도 지적사항이다.
두번째 농부와 여섯번째 농부의 자세는 어떤가? 지게에 저 정도의 짐을 얹었다면 좀더 상체가 앞으로 굽어야 마땅하다. 그러니까 단지 사진을 찍기
위해 부피만 커보이는 물건을 지게에 얹고 작가의 지시에 따라 다리를 건너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번째 인물과 네번째 인물의 편차 큰 사이에
토종개나 흑염소가 한 두 마리 끼어있다면 저 사진은 인위적인 차원을 떠나 작품으로서의 위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동물의 존재가 사진의
작위성을 희석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동물을 개입시킨다면 세번째 인물과 네번째 인물간 여백이 보완될 필요가
있다. 사진에 관심이 많아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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