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어떤 문학 사이트 게시판을 살피다가 놀랄만한 글을 발견했다. 바로
대현출판사의 '첫사랑의 체험수기' 원고 모집에 관한 글이었다. 나의 청소년기에 있어 빛나는 책으로 기억되는 <눈물 빛깔의 꽃>과
<꽃사슴의 시>가 바로 대현출판사에서 발행한 첫번째 '첫사랑의 체험수기' 모음집이다.
1977년이던가? 그 책은 예민한
청소년들의 정곡을 찌르며 단번에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았다. 난 책의 발간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나 시판일이 한참 지난 후에 정림사지 맞은편
동아서점에 들러 겨우 받아볼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며 얼마나 가열했던가? 책장이 얇아지는 게 너무나 안타까워 한 구절 읽고 하늘을 보고 다음
문장을 읽고 딴데로 시선을 옮겨 책에서 얻은 감동의 여운들을 놓치치 않으려고 애썼다. 온통 숨 막히는 문장들로 수놓아져 있었다.
<꽃사슴의 시> 표지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었다.
'아이야, 어둡고 깊은 숲속엔 가지 말아라. 그곳엔 너를
해치는 무서운 짐승 소리가 들린단다.'
그 글귀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 공모전 입상작들이 그렇듯이 대상과 최우수작을 빼놓으면 주제가
식상한 쪽으로 흘렀지만 '첫사랑의 체험수기' 글들은 한번쯤 체험해보고 싶은 우정과 사랑, 이별의 아픔, 환몽적 상상 같은 단어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대현출판사는 훨씬 이전부터 내게 친숙한 출판사이다. 난 중학교 2학년때 시초로 여학생 편지를 받아 어머니로부터 뒷골이
울리도록 후두부를 강타당했지만 반면 어머니의 배려로 해외펜팔을 한 경력이 있다.
월간 <소년중앙>지(誌) 광고에
착안하여 당시 유명 펜팔업체인 '메아리펜팔클럽(ECHO)'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했다. 산골 중학생이 해외펜팔을 한다는 건 획기적이었다.
가입비부터 만만치 않았다. ECHO 측에서 뺏지와 영어작문법 책을 보내줬는데 그게 대현출판사에서 나온 책이었다. 영어 실력이 깡통인 -우리
시절엔 중학교에 진학해서 ABCD 알파벳을 배웠다- 주제에 영작 편지를 쓰는 건 전적으로 대현출판사 교재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편지 한 장 쓰는데 걸리는 시간이 대여섯시간은 보통이었다. 저녁밥을 먹고 책상에 앉아 자정 넘어서까지 썼다. 책을 군데군데 베껴
조립하는 식이었다. 그래도 한 달 가량 흐르면 알레스카에 사는 여학생한테서 예쁜 답장이 왔다. 영어사전을 찾아가며 문장을 풀었지만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 아랫집 사는 고등학생 선배를 찾아가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편지는 토요일마다 집에 오는 큰누님 손에서 전혀 다른 내용으로
번역되곤 했다. 알고보니 선배의 영어 실력이 나와 별 차이가 없었다. 내가 깡통이라면 선배가 바가지 수준이랄까?
그래도 ECHO
회원으로 활동하며 영어 실력이 부쩍 늘었다. 알레스카 여학생은 곱고 예뻤다. 만년설이 희끗이 보이는 언덕에 서서 찍은 활짝 웃는 표정의 사진이
아직도 고향집 어딘가에 있으리라. 그러니까 엄격히 따지면 난 양다리를 걸쳤던 셈이다. 어머니께 뒤통수를 얻어맞게 했던 여학생과도 가끔씩 딱지
편지를 주고 받았으니...
그 시절 알레스카 여학생의 이름은 잊었지만 무슨 공원에서 곰을 만나 두 팔을 V자(字)로 치켜들고 서
있으니 곰이 오지 않더라는 경험담이라든가 알레스카 대륙이 지하자원의 보고(寶庫)라는 사실을 그때 실감있게 읽어 알았다. 가끔 여학생의 편지
서두엔 'Chang Soo' 혹은 'Sang Ki' 같은 이름들이 있어 펜팔 대상이 나 혼자가 아닐 거란 느낌을 받았지만 이성에 별로 동요하지
않았으므로 큰 문제가 안되었다. 파랑색과 빨강색 무늬가 교차되어 수놓아진 사각 봉투 우편물을 받는 자체만으로 행복할 따름이었다.
지난 여름휴가를 앞두고 문득 알레스카가 생각나 관광회사에 피키지 상품을 문의하니 360만원을 부르는 것이었다. '색소폰 한 대
값이구나' 생각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막상 갈 수 있을까마는 옛날 기억들이 떠올라 한 번 물어나 본 것이다. 내 생전 그 땅을 밟을 수
있을까? 밤 열한시가 되어도 어둠이 내리지 않는다는 광활한 대륙. 그러다가 순식간에 세상이 깜깜해진다는 말이었다.
첫사랑의
체험수기!
대현출판사에선 올해도 '첫사랑의 체험수기' 원고를 모집한단다. 그러고 보면 긴 세월 바통을 이어온 첫사랑의 체험수기이다.
첫사랑의 아픔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들이 주옥같은 빛깔로 엮어져 독자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