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이 생각 저 생각

[스크랩] 저수지 둑에서 보낸 푸른 밤의 추억

펜과잉크 2005. 8. 23. 07:46


1984년,
여름을 앞둔 유월. 저녁 무렵 속초를 출발하여 고성 근교 고성중고등학교 앞을 지나 진부령쪽으로 행군하다가 야지에서 일박 묵어가게 되었다. 민가 불빛이 보일듯 말듯한 산턱이었다.

묘하게도 우리가 있는 지점이 저수지둑이었다. 산의 빠른 계곡에 가파른 둑을 쌓은 것이었다. 난 저수지둑에다 텐트를 쳤다. 군용 A형 텐트였다. 안에 들어가 있으니 신선이 따로 없었다. 저수지에 잠긴 자욱한 별무리는 손을 뻗는대로 한 웅큼씩 건져질 것 같았다. 대충 텐트 정리를 끝내고 작은 SONY 손전축을 꺼내 틀었다. 그토록 황홀할 수가 없었다. 풀섶의 반딧불이... 수면의 물안개...

이튿날,
달콤한 잠에서 깨어나자 식단 트럭이 둑 아래까지 와 있었다. 밥과 반찬을 수령하여 텐트로 와 식사를 하고 한숨을 돌리니 오후까지 현지 체류 계획이란다. 중대원이 함께 저수지 안쪽 숲을 헤치고 한참을 돌아다녔다. 그 자체가 훈련이었다. 어느 숲에선가 시야가 탁 트이며 밭 가운데 외로운 집 한 채를 보았다. 다가가니 인적이 숨쉬는 살림이었다. 마침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달랑 단칸방만을 품은 빈촐한 오두막이었다. 그림이 따로 없는 느낌이었다.

이번에 만해시인학교 행사에 참석했다가 아들과 함께 가본 곳 중 하나가 고성이다. 진부령을 넘어 동해 방향으로 운전하면서 21년 전 밤에 손길 더듬어 텐트를 쳤던 그 저수지를 찾았다. 어디까지나 눈짐작이었다.
"저쯤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거야."
차를 서행하면서 난 하룻밤 추억이 깃든 그곳을 찾으려 애썼다.

아아, 있었다! 한순간 눈에 들어온 저수지... 그 저수지였다. A형 텐트를 치고 꿀맛 단잠에 취했던 곳 말이다. 냅다 목젖이 치밀리며 시야가 흐려졌다. 둑 밑까지 차를 몰고 가서 몸을 뉘었던 텐트 자리까지 밟고 싶었지만 다른 일행이 있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카메라의 줌 기능으로 몇 컷 담는데 만족해야 했다.

중식(점심)을 추진해온 트럭에선 전령이 큰소리로 군사우편에 적힌 이름들을 호명했다. 그날 받은 편지가 누구 글씨였더라? 아무리 죄어짜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잠들기 전에 보았던 수면의 별무리만이 세월의 간극을 넘어 푸른 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영혼 속에서...
출처 : 인성헌(吝醒軒)
글쓴이 : 류삿갓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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