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7월 1일.
그날은
은산장이었다. 오일마다 서는 장은 각 고을에서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때만 해도 농촌 경제는 그런대로 제 틀을 유지하고 있었다. 영농자금
이자빚 어쩌니 해도 정부 농정(農政)이 별 위기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오늘의 붕괴된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날 나는 입대
5일을 앞둔 몸으로 무슨 일이 있어 장에 나갔다. 분주한 시장통 거리에서 아랫집 어른을 뵈었다. 정중히 인사드리자 손목을 잡으시며 '벌써 군대
가니? 훈련소 가기 전에 설렁탕이라도 사 먹어라'는 말씀과 함께 2천원을 주시는 것이었다. 몇 번을 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그
돈은 103 보충대에서 검열 당하면서 압수(고향집 송금) 당했지만 그 돈의 의미는 평생 내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 요즘도 고향집에
갔다가 들에서 일하시는 아랫집 어른을 뵈면 꼭 다가가 인사 드리고 잠시 일을 도와드리며 이런 저런 말씀을 해드리곤 한다. 가끔 담배 보루나
음료수 박스도 갖다 드린다.
또 한 분, 박병기란 고향 형님이 계시다. 입대를 하루 앞둔 밤, 누가 불러 대문 밖으로 나갔더니
병기 형님이었다. 형님은 자꾸 미안해하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 준비한 게 5천원 뿐이다. 군대 가는데 이것 밖에 없어
미안하구나."
평소 각별한 관계에 무슨 돈인가 싶어 극구 사양했지만 그토록 미안해하며 건네는 성의에 의지가 꺾이고 말았다.
오늘날 고향에 다녀올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들리는 집이 초입의 그 형님 댁이다. 형님의 모친께선 구순을 내다보시며 노환에
시달리신다. 그래도 얼굴을 알아보시며 '어라? 기호네!' 하시니 그것만으로 가슴 뭉클하다. 그 연세에 돈의 쓰임새를 기억하고 계실까마는
3만원이든 5만원이든 꼬옥 쥐어 드리면 '아이고, 네가 또 주니?' 하시며 연신 감격해 하신다. 그 옛날 형님이 내 손에 쥐어주신 5천원의
의미보다 못하다는 걸 알지만 그렇게라도 뵙고 와야 인천으로 오는 마음이 편하다.
지난 5월 6일은 내 생일이었다. 음력 3월
28일! 어린이날 내려가 하루 묵고 아침에 어머님이 끓여주시는 미역국에다 밥을 말아 먹었다. 오후에 집을 나서노라니 어머님이 다가오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엄마가 네 생일이라고 밥 한 번 못 사주고... 인천 가면 어디 가서 꼭 한 끼 먹어라."
어머님은 4등분으로
접힌 만원권 지폐를 내 바지주머니에 넣어주셨다. 몇 번을 뿌리쳤지만 이번에도 받고 말았다.
그 돈을 난 쓸 수가 없었다. 그래
상의 호주머니에 그냥 넣고 다녔다. 어머님이 주신 돈이 몸에 있으니 그것만으로 신상이 편했다. 만사가 든든했다. 밥 한 끼 안 먹으면 어떤가?
한껏 몸에 지니고 다니다가 어머님 통장에 살짝 입금시키려 마음 먹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강원도 만해시인학교 행사에 참석하면서
수포로 끝났다.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라는 마을이 인천처럼 지척에 현금 인출기를 보유한 곳이 아니었다. 오지나 마찬가지인 현지에서 차량
기름을 주유하면서 그만 금쪽같은 돈에 손이 가고 말았다. 어쩔 수가 없었다. 3만원이 두 번(4등분) 꼬옥 접혀 있었다.
잠시 심란해 하다가 전화를 건 고향집에선 들판 농약 살포를 걱정하시는 어머님의 음성이 가슴을
찔러온다. 내 무슨 팔자에 강원도에 머물며 한량 같은 타령이나 하는가 싶으니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이 몰려왔다. 인천에서 온 일행만 없으면 당장
내려가고 싶었다. 인천에 와서도 이틀 가량 시름시름 보냈다. 신명나는 일도, 특별한 기행문도 쓰지 못했다. 신경을 집중해서인지 몸살 기운까지
일었다.
광복절 밤, 다시 고향집으로 전화를 드리자 두 분이 하루종일 들판에서
농약을 뿌리셨단다. 벼농사는 산림청 헬기로 살포하는 밤나무 단지와는 별도라고 하신다. 나는 말없이 어머님 말씀을 듣기만 하였다. 형제들 중
아무도 고향집에 내려갈 사람이 없었다니... 아우들 사정도 다들 이해가 갔다. 일일이 전화해서 물어보면 그만한 사정과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조만간, 늦었지만 고향집에 다녀와야겠다. 논두렁도 살피고 밤나무 밭도 둘러보고... 콩밭, 고추밭...
'雜記 > 이 생각 저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곰이, 몽이 (0) | 2005.08.24 |
---|---|
[스크랩] 저수지 둑에서 보낸 푸른 밤의 추억 (0) | 2005.08.23 |
대한민국 젊은이들이여! (0) | 2005.08.12 |
이순신 바로 알기 (0) | 2005.08.10 |
사진의 비애 (0) | 2005.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