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고향 생각

정월대보름 스케치

펜과잉크 2006. 2. 12. 12:37

 

정월 대보름을 맞아 아이들은 논둑이나 검불에 불을 놓고 쥐불 깡통을 돌립니다. 며칠 전부터 마을 산에 올라 소나무 가지의 관솔을 베어 모았다가 밤중에 들판으로 나가 돌리는 것입니다. 게으른 아이는 남의 논둑에 박아놓은 말뚝도 발로 걷어 차 부러뜨려 화목(火木)으로 썼지만, 대개 별중맞고 두시럭 떨기로 소문난 아이들이라 관솔을 비료푸대에 갖고 다니면서 깡통을 돌렸습니다.

쥐불 깡통 돌리는 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깡통에 숭숭 구멍을 뚫어 끈을 매답니다. 두레박을 축소시켜놓은 모형으로 보시면 됩니다. 거기에 송진이 덕지덕지 붙은 관솔을 넣습니다. 그런 다음 모닥불 같은 데에 깡통을 잠시 갖다 댑니다. 관솔에 불이 붙은 게 보이면 돌리십시오. 어깨 힘을 이용하여 둥글게 둥글게 막 돌리시면 됩니다. 그럼 깡통에 있는 관솔 화목에 불이 붙으면서 굉장한 화력으로 발전합니다. 깡통불 돌아가는 소리가 화룽화룽 들릴 정도로 커집니다.

쥐불은 낮보다 밤중에 돌리는 게 제격입니다. 들판 논두렁에 서서 되똥한 자세로 끈을 길게 하여 공중으로 휙휙 돌리면 도깨비불보다 큰 불덩어리가 쉬쉬쉬식 소리를 내며 돌아갔습니다. 몇 번 돌리다가 어깨 힘이 달리면 옆에서 군침 흘리듯 보고 있는 병천이 같은 아이한테 잠시 배려를 해주고 휴식을 취하면 됩니다. 남의 논둑 검불더미나 수풀('乾草')에 불을 붙이면서 말입니다.

가끔 끈 조절을 잘못하여 쥐불 깡통이 땅바닥에 부딪쳐 불씨가 튀어 올라 머리 위로 우수수 떨어지는 변도 당했지요.
'아이고, 저 눔 옷 다 타네.'
그러면서 함께 걱정해주었습니다.
길을 가던 점잖은 선배가 한 마디 던지기도 했습니다.
'임마, 지나가는 사람 마빡 때리겄다."

쥐불 깡통 큰 거 돌리는 청년은 처녀들한테 인기가 좋았지요.
"어머머, 저기, 저기... 보름달만한 불 덩어리가 누구 거여?"
"누군 누구여. 아까 낮에 민자네 밭마당(바깥마당)에서 재중이가 두레박에 구멍을 뚫고 있더먼. ...재중이 꺼 같은디..."
"어머 어머, 재중이 불 덩어리 되게 크네!"
"어머나..."
지나가는 아주머니도 관심이 고조되는 눈치입니다.
"재중이 것이 그렇게 크다고?"

어느덧 달은 중천에 둥실 떠서 바라만 봐도 숨가쁠 정도로 커집니다. 그 보름달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소원을 빌었지요.
가령 처녀라면 가슴 부푼 설계를 할 수도 있겠지요.
'올해는 보름달만한 품에 안겨서 뜨거운 거 한 방에 더운 숨 훅훅 몰아 쉴 날이 오야만 헐틴디 말여. 끄응~'
아주머니의 소원은 차원이 다르겠네요.
'아이고, 천지신명이여! 객지 나간 자식들 잘 있게 굽어 살피시고... 바깥 양반 술 취혀서 똥 밟고 다니지 않게 혀주시고... 둘째 놈 일허는 대동경운기주식회사 생산 라인 월급도 인상시켜 주시고...비료 대금, 농약 대금, 농협 이자빚 커지지 않게 살펴 주시고... 그저 담배 공판 대금 밑지지 않고 잘 받게 혀주시고...'

대보름이 지나면 마을 어른들은 거짓말처럼 뚝딱 몸을 털고 일어섭니다. 앞산 매운 마늘싹도 톡톡 틔우고 수렁들 들판에 두엄도 내다 부립니다. 똥독도 좀 비워야겠지요. 그리하여 우리 고향은 매년 풍년이랍니다.

 

*사진 출처 : photo by 청산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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