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고향 생각

나무 하러 가는 길

펜과잉크 2006. 2. 21. 01:48

 

 

 

아침에 집을 나서니 시원한 공기가 폐부를 찌르더군요. '차다' '춥다'라는 표현보다는 '시원한' 느낌의 대기였어요. 하늘을 보니 기러기 한 떼가 동북 방향으로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겨울이 가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 절기로도 오늘이 우수입니다.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이 며칠 안남았네요.

 

오늘 같은 날, 고향에선 나무 하러 가기 딱 좋은 날입니다. 여럿이 패를 지어 지게 하나 씩 지고 산으로 오르지요. 고만고만한 것들이 오릅니다. 땔감 나무는 아이들이 해오기엔 다소 버거운 몫이지만 놀이삼아 열을 지어 산에 오르는 일이 없지 않았습니다.

 

광순이 형, 규상이 형, 병모 형은 단골 나뭇꾼이었습니다. 아랫마을에선 병기형, 종환이 형이 성실했구요. 형들이 산에 오르면 올망졸망한 아이들까지 덩달아 올랐습니다. 형들이 땔감을 모으는 동안 병정놀이 같은 걸 즐겼지요.

 

산길은 좁은 소로로 이어져 한 줄로 나란히 올라야 합니다.

"지난번 내가 저쪽이서 푸작나무를 허는디 호랭이 한 마리가 슬금슬글 지나가더먼."

구렁터(골안터) 종환이 형이 먼저 한 마디 합니다. 그럼 앞서 가던 병기 형이 응수를 합니다.

"네 말에 그짓말(거짓말) 아닌 게 몇 마디나 되냐? 호랭이만 봤냐?"

"꼬리 아홉 달린 여우도 봤는디... 오늘은 낙타도 볼 것 같구먼유."

"그려. 최종환이나 허니께 두턱골(둔터골) 산고랑이서 낙타를 보지. 잘났다!"

"작년 여름이는 옹기점골 밭고랑이서 백사두 봤다가 놓쳤유."

"알었다. 너나 허니께 백사, 흑사를 놓친다. 우리 같으먼 어림 없는 일이여. 아따, 그런디 넌 생긴 것부텀 이담에 마누라 사타구니에다 쇠 달금질께나 허게 생겼어."

"음하하하핫..."

종환이 형은 소처럼 웃으며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반칭이 산은 병태네 산이라서 피하고, 음지골 산은 준구 아버지 때문에 피하고... 기원네 산에선 아침 일찍 올라온 머슴 형복이가 이미 나뭇짐 하나를 완성해놓고 담배를 꼬나뭅니다.

"어떤 씨발놈이 우리 산이서 나무를 허는 것이여?"

그 놈은 머슴답게 버릇없는 폼으로 괜히 지나가는 행렬에 대고 한 마디 던집니다. 선수를 치는 것입니다. 산을 지키고 있으니 얼씬도 말라는 뜻이겠지요.

 

이 산, 저 산, 남의 산을 피해 가다보면 어느덧 검산골까지 닿게 됩니다. 거기서 지게를 풀어놓고 땔감을 하게 되지요. 하지만 멀리까지 갔는지라 가급적이면 화력이 센 삭정이를 모으기에 몰두합니다. 푸작나무는 갈퀴만 좋으면 가까운 뒷산 솔밭에서도 긁을 수 있으니까요.

 

삭정이 나무는 아담한 단으로 모아 칡순으로 단단히 묶습니다. 그렇게 서너 단을 만들어 지게고리로 마무리 지어 지겟날로 꽂아 일으켜 세우면 근사한 나뭇짐이 되는 것입니다. 나뭇짐을 보면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병기 형님은 나뭇짐을 아담하게 만들었습니다. 종환이 형님은 거칠었어요. 광순이 형님과 규상이 형님은 작고 예뻤지요. 병모 형님은 지게가 시원찮아 나뭇짐이 한쪽으로 비뚤어져 보였습니다.

 

어느덧 해가 중천에 뜨고 뱃속에선 허기가 돕니다. 지게를 지고 가면 밥상 앞에 앉을 생각부터 날 것입니다. 청년들은 나뭇짐만 봐도 배가 부르다는 표정입니다. 그래 여유가 있으면 나뭇짐을 세워놓고 앉아 이런 저런 담소를 나누지요. 땀을 식히고 숨을 돌리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근데 엉덩이 푸짐헌 여자를 보면 막 꼴린다니께."

이번에도 병기 형이 먼저 그럴사한 화두를 던집니다.

"뭐가 꼴려유?"

종환이 형은 역시 이해력이 더딥니다.

"꼴리는 게 몇 개나 되나? 여자 궁뎅이 보고 꼴리는 걸 말허는 것이지."

"전 종학이 형님 형수만 보먼 그렇게 꼴리대유. 눈가에 상냥기가 자글자글헌 게 아주 밝히실 것 같어유."

"저런 싸가지 읎는 놈의 새끼... 지 친척 형수더러 꼴린다네. 넌 돼지만 봐도 꼴리지? 그치?"

그러거니 종환이 형님은 또 예의 그 좋은 마음씨로 웃음 한 보따리를 터트립니다.

"음하하하핫..."

웃음소리는 온 산의 메아리가 되어 돌아옵니다.

 

오늘날, 고향에 가면 땔감을 하는 집이 한 집도 없습니다. 모든 집이 보일러 구조로 바뀌었습니다. 부엌도 입식으로 개조되었습니다. 산에 오를 일이 없어졌습니다. 적어도 땔감 나무를 하기 위해 산에 오르는 일은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오르지 않는 산은 길이 끊기기 마련입니다. 그래 저희 어릴 적에 반들반들했던 고향의 산길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지게를 지고 다닐 일도 없습니다. 농법 자체가 기계식으로 바뀌었습니다. 농약도 비행기가 와서 싹 해결해줍니다. 작년에 내지리에서 농약 뿌리던 헬기가 추락하여 부여군청 직원 세 사람이 다친 거 뉴스에서 보셨지요?

 

과거에 비하면 천지개벽이나 다름 없습니다. 저희 고향 수렁들이 반듯이 경지정리되어 들판 중간으로 아스팔트 도로가 뻗을 줄 상상이나 했던가요? 저희 고향만이 아닙니다. 가중리, 비지재, 정수터, 내지리 같은 마을의 들판이 모두 오래 전에 경지정리가 되었습니다.

 

인적이 끊긴 산엔 낙엽이 쌓이고, 그 낙엽이 썩어 거름이 됩니다. 일등 거름발입니다. 그리하여 과거 난쟁이 나무들이 오늘날 죄다 아름드리 덩치로 변해 있는 것입니다. 산은 온통 빽빽한 수림으로 우거졌습니다. 밤나무 단지를 제외한 모든 곳이 말입니다. 그 산엔 멧돼지, 고라니, 오소리, 너구리, 꿩, 산토끼, 청설모, 족제비 같은 동물들이 삽니다. 야생 동물의 천국인 셈입니다. 그리하여 가끔 숲에서 발정난 고라니 암수가 다투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합니다.

"크웩~. 크웩~"

"흠냐~"

 

머지않아 산짐승들이 마을로 나무 하러 내려올지도 모릅니다. 마실을 올 지도 모릅니다. 평화로운 내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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