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중리에서 정수터 방향으로 가다 보면 가중리 전방 대략 1킬로미터 지점 오른쪽에 일단의 촌락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을 '남면주택'이라 부른다. 남면주택은 정부 지원금으로 지어진 주택으로 30여년 전만 해도 처음 지어졌을 때의 가옥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10-15 세대 가량 일정한 형태를 취한 가옥이었다. 내 기억엔 이(二) 자(字) 형으로 주욱 도열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6. 25 전쟁이 끝난 후 정부에서 지어준 주택이 아닌가 추측된다.
가중리 사시는 '이익종'이란 분은 한때 은산면 부면장까지 역임한 분인데 이 분이 팔순 기념으로 펴낸 자서전을 보면 6. 25 피난 당시 가중리 주민들이 '둔터골'로 피난 들어가 천막을 치고 살았다는 부분이 나온다. 이익종 씨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을 데리고 '경둔리로 피난 가서 고목나무 밑에 천막을 치고 살았다'고 술회하고 있는데, 여기서 '고목나무'라 함은 중뜸 샘안집 초입의 팽나무가 아니라 윗말(병목안) 초입에 있는 노령의 느티나무를 말한다. 정확히 꼽자면 새마을운동으로 도로가 확장되기 전 느티나무 길 건너에 커다란 참나무가 있었는데 이익종 씨 가족이 그 참나무 밑 공터에 천막을 치고 피난살이를 했다는 것이다. 지금 설명한 부분은 이익종 씨 책을 읽고 아버님께 여쭈어 확인한 사항이다. 아버님은 이익종 씨의 피난살이를 정확히 기억하셨다. 아버님으로선 외갓집이 있는 동네라서 더욱 각별히 기억될 거라 믿어진다.
우리 동네 정동현 선배의 사촌 형님 중에 우리집과 이웃해 있다가 대천으로 이사 떠난 정동일이란 분이 있다. 그러니까 지금 영준이 어머님이 정동일 씨의 누나 되는 분으로 결국 영준이 어머님과 정동현 선배는 사촌인 셈이다. 그런데 정동일 씨의 바로 위 누님이 가중리 남면주택으로 시집 가서 살았다. 그 분은 별명이 특이해서 동네 어른들이 '꺼꾸리'라고 불렀다. "얼래, 저기 꺼꾸리 오네." "꺼꾸리 미니스카트 멋있어."
꺼꾸리 님의 남편은 큰 키에 점잖은 인상이었는데 우리가 어렸을 적에 인사를 드리면 늘 웃는 표정으로 받곤 했다. 남면주택의 살림살이가 멀리서도 보이는 형편이라 안 봐도 뻔했지만 누구에게 해꼬지를 하고 살 천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이 부부는 현재에도 남면주택에 살고 있는 바, 지금은 형편이 좋아져서 과거와는 천양지차로 산다고 한다. 하긴 두 분 모두 선량해서 하늘이 복을 내리신 것이다.
공교롭게도 정동일 씨의 배우자 되는 분도 남면주택에서 시집을 오셨다. '꺼꾸리' 씨가 중매를 섰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분 남동생이 홍주 형 환수 선배와 동창으로 아주 절친했던 걸로 기억한다. 만날 두 분이 어울려 다녔으니 말이다. 그 아래 우리와 동갑인 친구가 바로 형기이다. 형기도 1979년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우리와 자주 어울렸다. 홍주네와 친척 내지 인척지간으로 알고 있는데 홍주한테 확인한 사항이 아니라 단정 짓진 못하겠다. 내가 볼 적엔 형기 어머님과 홍주 어머님이 한때 자주 왕래를 하셨던 기억이 난다. 가끔 은산장이나 가중리 주막에서 막걸리도 같이 하셨고...
이 밤에 깨어 별 걸 다 얘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3.5명만 거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알고 보면 다 아는 사람들인 것이다. 어쩌면 은산면민 모두가 한데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언제 시간이 되면 우리 동네 저수지에서 달밤에 동성 연애를 즐겼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늙은이들이 어린애들을 꼬셔서 밤중에 저수지둑 같은 데로 불러내어 아랫도리를 빨고 핥게 했다는 내용이다.
고(故) 이정환 님의 소설집 <까치房>엔 남사당에 관한 작품들이 실려 있는데 거기에도 늙은 고수들이 새로 들어온 나이 어린 것들을 데리고 노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십여년 전 흥행했던 국내영화 중 이청준 원작이었던 <서편제>에서의 유봉이나 금산댁 아들 동호의 삶처럼 소리꾼 소녀(유봉의 양녀)와 연결되는 사람들이 남사당의 고수들 중 더러 부적절하게 목격되는 층들과 비슷한 급(級)이라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서편제>에선 금산댁과의 관계로 인하여 위기(?)가 비켜가지만 그러한 식의 '유랑'이 많았던 시절이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으리라.
중학생 시절, 등교 길에 남면주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곤 했던 기억이 난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의 고향의 역사를 읽게 해주는 '남면주택'이다. 아련한 슬픔 뒤로 오손도손 살아가는 고향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때 거기 사람들은 아직도 거기 그냥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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