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농촌의 중학교 이야기다. 그 학교 학생은 농사꾼 자식들이 대부분이다. 고작 산다고 해봤자 과수원이나 땅뙈기 면적이 남보다 조금 많을 뿐이다. 부모 중 한쪽이 공무원이거나 방앗간을 하거나 잡화점을 하여 자식들을 가르치는 환경이라면 여유로운 편이었다. 대부분의 농사꾼 집안에선 오뉴월에 이르러 학교 등록금도 밀리는 판이었다. 그 중학교 출신 중엔 사업을 하여 돈께나 벌었다고 소문난 사람도 있지만 부모의 가업을 이어받아 고향에 묻혀 농업만을 '받들어 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동창회를 하면, 예를 들어 기업회장, 대학교수, 의사, 교사, 국가공무원, 부동산중개인, 한복연구가(한복집 주인), 운수업자(택시운전수), 밭농사 짓는 사람 같은 천태만상의 부류가 모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뿌리는 어떤가? 오늘날 기업의 회장이 되어 중형 세단으로 고향 길을 문지르며 온 듯한 사람도 결국은 그 ‘농촌’ 태생인 것이다. 그 동창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누가 거성어페럴 상표가 붙은 골프웨어 칼라 깃을 세워가며 ‘나 요즘 골프 좀 치네’하거나, 가령 잠실운동장 주변에 가면 노점에 깔아놓고 파는 중고 골프채 같은 걸 차에 싣고 다니며 ‘나이크힐스’에서 놀았다느니 제주도 ‘엘리시안’ 어쩌고 떠든다면 실로 이질감을 느끼기에 딱이다. 엄격히 따져 골프웨어는 시골 중학교 동창회에 참석하여 개폼 잡을 때 입는 옷이 아니라 골프장 가서 운동할 때 입어야 제격인 것이다. 또한 제자들의 초청을 받고 온 ‘스승’이란 사람의 처세는 어떤가? 비록 훗날 결혼을 하여 서울 압구정동 혹은 분당 중심가에 살고 있을지는 몰라도 필드에서 골프채 짚고 서서 찍은 사진이나 보여주며 ‘나 요즘 이렇게 살아’ 어쩌고 한다면 그 제자들이 진정 ‘역시 스승님은 멋지십니다’라며 감탄해 할 것인가? 물론 그런 치들이 없다고 단정내릴 수 없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라! 묵묵히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는 소박한 동창생을 생각해보자. 아침부터 경운기 혹은 트랙터 시동을 걸어 황량한 대지를 누비고 다니며 밤나무 밑둥에 비료 주고, 전 치고, 언덕 까뭉개어 새 길을 내고, 더러는 돌멩이에 마빡을 다쳐가면서 가업을 이어가는 목숨붙이 말이다. 어쩌면 시커멓게 타 있을지도 모를 그, 어디 한 군데 붕대를 감고 있을지도 모를 그, 뒤꿈치 꿰맨 양말을 신고 있을지도 모를 그, 지갑의 만 원짜리 몇 장이 보유현금의 전부일지도 모를 그, 동창회 회비까지 지독한 마누라한테 사정하여 가지고 왔을지도 모를 그……. 그 앞에서 ‘나이크힐스’는 뭐고 ‘엘리시안’은 뭐냐? 맥주에 취해, 양주에 취해 ‘로드랜드’나 ‘블랙스톤’을 찾아쌓는 동창 앞에서 필드가 뭔지도 모르는 시골 동창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속으로 부르짖을지도 모른다. ‘이놈들아, 동창회를 하려면 똑바로 혀. 똑바로 허란 말이여. 근본을 망각한 채 삐까번쩍한 옷에 스킨 로션 찍어 바르구 다니먼서 골프채만 휘두른다고 전부여? 동창회가 뭘 과시하려구 모이는 자리냐 이거여. 옛날에 등록금 몇 천원도 기일을 넘겨 한 달씩이나 지난 후에 내느라고 선생님 헌티 구박께나 받던 저기 저 눔도 오늘 보니 골프 마니아 그룹의 일원이구먼. 야, 임마. 너 아부지 어제두 은산 사거리 육간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가랑비 맞아 가며 담배꽁초 줍고 계시더라. 이 씨발눔아.’ 스승님, 제자들 동창회에 초청받아 나오시면 우상(偶像)의 이미지 그대로 손상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세요! 스승님이 언제부터 프로골프 선수가 되셨습니까? 네? 제자들이 본받습니다. 무릎 튀어나온 추리닝에 아이스크림 빨아가면서 콩나물 봉지 들고 다니던 제자가 남편의 신용카드 긁어 골프웨어 사게 생겼다니까요. 그리고 ‘동창’ 여러분, 적어도 고향 동창회에서만큼은 똥폼 잡지 맙시다. 그 옛날, 제가 소 풀 뜯길 적에 멧비둘기 쫓아다니며 간장딸기 뒤져 먹던 님아…….
|
'雜記 > 고향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남면주택 (0) | 2007.01.14 |
---|---|
[스크랩] 고향의 겨울밤 (0) | 2007.01.07 |
구륜 탈곡기와 영화 '잘 살아 보세'의 상관성 고찰 (0) | 2007.01.02 |
겨울밤 (0) | 2006.12.19 |
[스크랩] 만추 (0) | 2006.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