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하늘
어머니는 그쪽을 무시하고 다른 쪽에 뭐라고 긴 장문을 적으셨다. 그리고 고이 접어 내 품에 넣어주셨다.
나는 산을 넘고 들을 지나 한나절을 걸어 외가에 도착했다. 곧 외할아버지께 편지를 드렸다. 할아버지는 마루에 앉으셔서 예의 엄숙하신 표정으로 편지를 읽으시는 것이었다.
순간,
외할아버지는 편지를 읽으시다 말고 뭔가를 생각하시는 눈치였다.
나는 더 이상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외할아버지는 대략 다음과 같이 읽으셨던 것 같다.
그러면서 계속 이어가셨다.
외할아버지는 뭔가를 또 생각하시는 표정으로 긴 담뱃대에 불을 붙이셨다.
그렇게 하여 어머니는 또 우리가 먹을 양식을 구해 오시는 것이었다.
참고로,
외할아버지는 일찍이 자수성가하신 분이라 가족에 대한 집착이 유별나셨던 것 같다. 한 번은 논산으로 시집 간 둘째 누이동생이 삼 년 만에 왔는데 모진 시집살이로 피골이 상접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곧장 누이동생을 앞세우고 논산으로 가서 곡괭이로 그 집의 안방 구들 몇 장을 찍어 엎었다고 한다. 그게 정상인의 상식으로 가능할까 모호하지만 어쨌든 그 후로 누이동생은 시댁에서 당당히 대우받으며 살게 되었다는 후문이다.
직사각 반상(飯床)에 아버지 나 아우 둘의 밥공기가 얹어지고, 다리 없는 쟁반에 어머니 누나 여동생의 밥그릇이 놓여져 끼니를 잇던 시절, 긴 겨울밤을 자고 일어나면 마루 요강자리에 오줌이 얼어붙어 있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버티고 살아온 질경이 같은 세월이 몇 해이던가? 부모님은 예나 다름없이 그 자리에 온전하시건만 형제들은 한 번 크니 다시 모이기가 힘드는구나. 불현듯 월명사(月明師)의『제망매가』 한 소절이 떠오른다.
어는 가을 이른 바람에
죽은 누이를 빌어 인간고(人間苦)의 종교적 승화를 노래한 『제망매가』이지만 '같은 부모한테 나고서도 가는 곳을 모르'는 형제들의 운명은 같지 않을까 짚어 보게 된다.
내 나이 마흔 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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