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양초등학교 교문 앞엔 부여-청양간 도로가 지나간다. 이 도로가 포장된 게 언제이던가? 아스라한 옛적 같지만 막상 따져보면 손가락 열 번을 구부렸다 펴는 중에 탁 멈춰서는 그 어느 해쯤 되리라! 그렇게 하여 중부 내륙 산간 오지 청양이 남서쪽으로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실 청양은 심산유곡처럼 비유될 수 있으나 그 이면엔 외부와의 철저한 단절로 불과 십 수 년 전 만해도 산골 오지 중의 오지였다. 오죽하면 칠갑산 어디 메에 '며느리 도망 간 밭'이 실재한다 하겠는가.
아무튼 대양초등학교는 부여-청양간 사이에 있어 산골 아이들에게 교육의 요람으로 우뚝 서 있었다. 굳이 학군을 따진다면 나령리 조령리 대양리 오번리 차중리 정도가 될 것이다. 대양초등학교 앞산 너머 '검산골'이란 곳도 행정상으론 대양리 혹은 차중리에 속하리라 믿는다. 이 검산골에도 한때 적잖은 가옥들이 움집 해있었음을 기억한다.
6. 25 전란 중 대양초교 앞 한길에서 버스가 폭격을 맞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정확한 지점은 대양초등학교에서 청양 방향으로 1백여 미터 지나친 지점으로 아마 지금의 박덕신 고향집으로 올라가는 지점쯤 되지 않았나 한다. 버스가 먼지를 뿌리고 날리며 달리던 중 어디서 나타난 공중기가 포탄을 떨어뜨려 버스가 반파(半破)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현장을 목격한 증언을 토대로 했음을 밝힌다. 목격자는 바로 내 어머니이다.
6. 25 전쟁은 대양초등학교 학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준 듯 하다. 한 번은 인민군들이 밤에 민가로 내려와 소를 내놓아라 하여 여섯 마리 중 한 마리를 풀어줬는데 자정이 가까워 무엇이 씩씩거리며 울안을 뛰어 다녀서 나가보니 잡혀갔던 소가 대문을 부수고 마당으로 도망 왔다는 것이다. 소는 머리에 상처를 입고 코뚜레도 뽑혀 선혈이 낭자했는데 곧 뒤쫓아온 인민군에게 잡혀 끌려가 끝내 도살을 당했다는 후문이다. 어머니는 그 말씀을 아주 생생히 전해주셨다.
"그들이 양민들에게 해꼬지 한 건 아니지만 가끔 그 같은 짓을 하고 다녔다." 어머니의 말씀을 잘 들어보면, '그래도 그나마 그 일대는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라는 추정을 낳게 한다. 인민군 대열이라는 것도 적지의 인구나 행정도시의 규모를 감안하여 상주하였을 터이니 결과적으로 '은산면'이라는 곳이 인민군들에겐 중요한 득실로 부각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추정을 내리는 이유는 이웃 논산군 성동면 같은 곳에선 상당히 많은 양민들이 몰살당했던 바, 어느 마을에서는 양민들을 산 채로 묶어 마을 공동 우물에 수장을 시켜 버린 예도 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인민군 혹은 좌익의 상대는 누구인가? 바로 부르조아 계급, 이를테면 부(富)를 축적한 지주(地主)들이었다. 성동면이 어떤 곳인가? 평야지대로 농업을 근간으로 한 벼농사가 발달된 지역이다. 세상이 뒤엎어지자 평소 지주들에게 괄시를 받던 천민들이 좌익으로 돌변하여 죽창과 몽둥이로 무장하고 지주들을 색출해 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지주계급들이 은산면엔 없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러니 그 지역에 배치된 인민군들도 별 볼 일 없는 군대에 불과했을 것이다. 가령 해안초소에서 갈매기 똥이나 닦던 출신들이라든지…….
1970년대만 해도 대양초교 교문 건너편엔 주막이 있었다. 우리가 흔히 '송방'이라 부르는 구멍가게 수준의 잡화점도 있었다. 빨래비누와 면 장갑, 어린애 기저귀 고무줄, 풍선 같은 것들을 종합적으로 파는 '기타 등등 잡화점' 말이다. 그런데 아까 말한 주막은 그런 대로 성업이었다. 인근의 농사꾼들이 주전자로 막걸리를 받으러 다니는가 하면 아예 통으로 배달시켜 모내기하는 집들도 있었다. 주막은 또 입이 국급한 사람들이 공것을 찾아 어슬렁대는 예가 흔하여 취객으로 분류되는 사람들도 자주 눈에 띠었다.
주막은 철 따라 오후 너 대 여섯시가 되면 그늘이 지도록 동북쪽으로 학교와 마주해 있었다. 그 주막은 버스의 정류소를 겸하여 나무기둥에 '忠南交通恩山面大陽里停留所'라는 세로문장도 있었던 것 같다. 바깥쪽에 낡은 마루도 있었던가? 40년도 더 되는 옛날을 회상하기엔 무리가 따르지만 적어도 그곳은 사람들의 체취가 식지 않는 곳으로 기억된다.
학동들은 그 길을 걸어 학교와 집을 오갔으리라. 대양초등학교 교문을 나와 차중리 방향, 그리니까 임영섭 고향집 쪽으로 뻗은 길은 제법 지루한 노선이다. 차가 지나칠 적마다 먼지가 일어 가을이면 길 양편 코스모스 군락이 온통 뽀얗게 변했다. 학동들은 그 길을 걸어 삼거리에 이른 후 몇은 검산골 쪽으로, 몇은 차중리 방향으로 걸었을 것이다. 차중리 방향은 산밑으로 다리 하나가 있었는데 이 다리를 건너면서 왼편에 방앗간이 있었다. 거대한 고목 한 그루도…….
잠시 한 가지를 부연하면, 대양초등학교 뒷산 너머, 개울가 언덕의 산은 북향임에도 상당히 많은 봉분이 있었는데 이 봉분들은 정상 사인(死因)이 아니라 주로 어린 송장들을 갖다 묻은 곳이라 한다. 애장무덤들이 즐비한 봉분 사이로 여우가 울며 다니던 모습을 어머니는 어제 일처럼 들려주셨다.
내 나이 다섯 살 때던가? 오번리 문환이네 고향집 뒤편에 널따란 묘역이 있었는데 이 묘역이 동네 아이들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어린 몸으로 그곳에 가면 문환이, 영민이, 영호 같은 또래들을 만났던 바, 이들이 훗날 중학교에서 만나게 된 동창 김문환, 최영호였던 것이다. 영민이는 그 전에 서울로 전학을 간 것으로 안다.
한 번은 부여 사는 이종누나랑 주전자 가득 다슬기를 잡고 있는데 학교에서 집으로 가던 대양초등학교 학생 하나가 발로 주전자를 툭 차는 것이었다. 나중에 뛰어 갔더니 주전자가 폭삭 엎어져 내용물이 죄다 쏟아진 채 처박혀 있었다. 그때 그 학생, 그러니까 눈이 부리부리했던 그는 훗날 알고 보니 오리올 이창범 어른의 아우로 우리 어머니 사촌동생이었다.
당시만 해도 오번리엔 함평 이씨 집안들이 많이 살았다. 이문범 이무범 이창범 이주범 이홍범 이길범 이신범 이양범 이대범 이상범 이순범 이춘범 이효범 이화범…….
"사촌들이 많다 보니 별종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창범이는 학식과 필체가 좋아 이웃들이 알아줬는데 입만 벙긋하면 뻥(거짓말)을 쳐서 통 신뢰를 쌓지 못했지."
대양초등학교의 역사가 얼마나 될까? 그 학교 역시 폐교되어 은산초등학교로 흡수되고 말았다. 하지만 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이촌(離村)은 오히려 농촌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다. 우리 고향 현실만 보더라도 합수·대양·매화·거전초교가 없어지고 은산초교로 통합되어 각처 스쿨버스가 운행됨은 물론 복지 면에서 다양한 혜택을 누리고 있는 중이다.
대양초등학교 출신들의 건강과 동문회 발전을 빈다. 갈곳이 생겨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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