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고향 생각

은수원사시나무와 스승님

펜과잉크 2007. 5. 30. 18:16

 

창 밖으로 눈을 돌리면 은수원사시나무 군락에 바람이 일렁이는 모습과 맞닿는다. 군락은 지금 짙은 녹음이어서 마치 쑥물을 뒤집어 쓴 것 같다. 바람에 잎이 흔들릴 때마다 엽록체 밑면의 희끄무레한 색깔로 뒤집어 바뀌어지면서 군락은 파도를 연상케 한다. 그 위로 오월의 햇살이 내리쬐고, 군락 너머 도시 끝으로 서해바다가 펼쳐져 있다.

 

우리 중학교 때 농업 과목을 가르쳐주신 안병갑 스승님은 은수원사시나무에 대해 강조하셨다. 은수원사시나무는 성장 속도가 빨라 조림사업의 식수로 아주 좋다는 말씀이셨다. 그리하여 운동장 아래에 실습장이란 푯말을 세워 일정한 간격의 줄대를 꽂고 은수원사시나무 묘목을 심었다.

 

묘목장, 그러니까 아까 얘기한 실습장을 일구고 묘목을 심고 풀을 뽑는 일은 오직 학생들 몫이었다.
"내일 농업시간엔 실습장에서 실습을 할 것이니께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까먹는 학생이 없도록 해요. 에, 그러니께 1분단은 전부 호미를 갖고 와요. 2분단은 삽을 갖고 와요. 3분단은 삼태미를 갖고 와요. 4분단은 송기운 앉은 데까지 쇠스랑을 갖고 와요. 송기운 책상 뒤쪽 학생들은 빈손으로 와요. 대신 실습시간 5분전까지 창고로 뛰어가서 당까(들것)를 들고 와요. 흙을 담아 내야 허니께."
 
등교하기 전, 연장간을 두리번거리며 삽을 찾던 기억이 난다. 날이 온전한 삽 자루에 가방 걸어 어깨에 메고 욕골, 서낭당고개, 절골 저수지, 혁철이 형네 집 앞, 갓골, 가중리, 함적골, 은산사거리를 하염없이 걸었다. 그 시절의 삽이라는 건 왜 그리 무거웠던가? 어깨를 파고  드는 통증에 뼈가 쑤셨다.  

 

실습시간이 되어 연장을 들고 운동장 가로 모이면 곧 안병갑 선생님이 오셨다. 학생들 중엔 더러 연장을 빼먹고 온 아이들도 있었다. 안병갑 선생님은 그 경우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다.
"어제 2반은 100퍼센트 모두 연장을 갖고 왔는디, 오늘 놈들은 되게 저조허구먼……. 얀마, 류지환, 넌 지난번에도 빈손이더니 이번이두 빈손이냐? 엉? 저, 저, 저눔의 시끼……."
류지환은 또 둘러대느라 진땀을 흘렸다.
"성님이 오늘 논두렁 무너진 거 쌓는다구, 삽이 없으먼 안 된다구, 절때루 어디  갖고 가지 말라구 그려서유. 괭이루 가져올까 삽으로 가져올까 한참 고민허다가 그냥 왔어유."

 

그런 절차를 마치고 동원된 학생들은 삽이나 호미, 쇠스랑을 들고 실습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다들 분주히 움직였다. 한 시간 동안 흙 고랑에서 일을 하노라면 손이고 얼굴이고 흙먼지로 가득할 때도 있었다.  

 

저녁때 집으로 가는 길은 또 왜 그리 힘들던가? 중학교 길은 중간에 찔레를 꺾어 먹을 곳도 없고 종다리 밭도 없었다. 황량한 길 따라 십리를 걷노라면 더러 지랑풀만 발에 채일 뿐….

 

가끔은 집에서 다음과 같은 아버지 말씀도 없진 않았다.
"종호야, 연장간에서 삽을 꺼내 갔으면, 꺼내 갔다고 얘기를 허구서 꺼내 갔어야지, 구렁터  밭두둑 흙 퍼 올릴 일로 삽을 찾으니, 이 놈의 삽이 대체 어디 갔는지 알어야 찾지, 응? 그려서 임시 방편으로 종오네 집이서 삽을 빌려 때우고 오긴 혔는디…. 세상에 농사짓는 집이서 연장 빌리러 댕기는 일두 바른 것은 아녀. 흉이라면 흉이 될 수도 있는 거란 말이여. 그러니께, 담부터는 낫자루 하나 내렸다가 서너 발짝 움직이고서 올려놔도 꼭 말을 허구서 혀라이?"

 

안병갑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던 어느 날 수업시간이 생각난다. 선생님이 칠판에다 '女'자를 근사하게 써놓으시곤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여러분, 이 자(字)가 무슨 자(字)인 줄 알지, 이? 이 자(字)가 바로 '계집 녀'자여. 그런디 말여. 여러분들이 이 계집 女자(字)를 쓰는데 있어서 매끈하게 잘 쓰면 훗날 마누라 몸매도 매끈하게 잘 빠지는 것이고, 비뚤어지게 쓸 것 같으면 훗날 마누라도 삐뚤어진 걸 얻게 된다, 이 말입니더. 가령 좌우로 퍼지게 써놓을 것 같으면 마누라 될 여자의 몸매가 오천평이라고 생각허면 되는 거여, 이? 그러니께 오늘부터 '계집 녀'자(字)를 연습허는디 있어 똑바로 잘 써지도록 허야만이 훗날 매끈한 마누라를 얻을 수 있는 거여. 알겠지, 이?"
그 말씀이 농담이신 걸 알면서도 펜촉에 잉크를 묻혀 '계집 女' 자(字)를 얼마나 썼던가? 쓰고 또 쓰고, 또 썼다.

 

문득 그 시절 즐겨 쓰던 '계집 女'자(字)를 떠올리며 아내를 생각해본다. 처음 아내는 멋있는 '계집 女'였다. 지금은 좌우로 퍼진 몸이 되었지만…. 필체는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반면 마누라는 좌우로 퍼져만 가는 것인가?

 

안병갑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우리 중학교 동창 중 장영미 황영미 오창순 이기자 이지용 같은 인물들의 배우자는 '계집 女'자(字)를 근사하게 쓰는 필체일 것이다. 반면 임종례 이경자 이명숙 같은 동창들의 배우자들은 '계집 女'자(字) 하나 제대로 못쓰는 악필일 듯….

 

지금도 여전히 창 밖 은수원사시나무 군락엔 바람이 분다. 혹시 저 나무가 묘목 시절 우리 중학교 실습장서 옮겨와 심어진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자니 제자들 앞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가르치시던 안병갑 선생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뵙고 싶은 먼 옛날 고향의 스승님이시다.
 

 

'雜記 > 고향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대양초등학교를 논제로  (0) 2007.06.28
내 고향 무량천도교(無量天道敎)  (0) 2007.06.27
[스크랩] 貧村  (0) 2007.05.25
고향별곡  (0) 2007.05.23
[스크랩] 봄바람  (0) 2007.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