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밖으로 눈을 돌리면 은수원사시나무 군락에 바람이 일렁이는 모습과 맞닿는다. 군락은 지금 짙은 녹음이어서 마치 쑥물을 뒤집어 쓴 것 같다. 바람에 잎이 흔들릴 때마다 엽록체 밑면의 희끄무레한 색깔로 뒤집어 바뀌어지면서 군락은 파도를 연상케 한다. 그 위로 오월의 햇살이 내리쬐고, 군락 너머 도시 끝으로 서해바다가 펼쳐져 있다.
우리 중학교 때 농업 과목을 가르쳐주신 안병갑 스승님은 은수원사시나무에 대해 강조하셨다. 은수원사시나무는 성장 속도가 빨라 조림사업의 식수로 아주 좋다는 말씀이셨다. 그리하여 운동장 아래에 실습장이란 푯말을 세워 일정한 간격의 줄대를 꽂고 은수원사시나무 묘목을 심었다.
묘목장, 그러니까 아까 얘기한 실습장을 일구고 묘목을 심고 풀을 뽑는 일은 오직 학생들 몫이었다.
실습시간이 되어 연장을 들고 운동장 가로 모이면 곧 안병갑 선생님이 오셨다. 학생들 중엔 더러 연장을 빼먹고 온 아이들도 있었다. 안병갑 선생님은 그 경우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다.
그런 절차를 마치고 동원된 학생들은 삽이나 호미, 쇠스랑을 들고 실습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다들 분주히 움직였다. 한 시간 동안 흙 고랑에서 일을 하노라면 손이고 얼굴이고 흙먼지로 가득할 때도 있었다.
저녁때 집으로 가는 길은 또 왜 그리 힘들던가? 중학교 길은 중간에 찔레를 꺾어 먹을 곳도 없고 종다리 밭도 없었다. 황량한 길 따라 십리를 걷노라면 더러 지랑풀만 발에 채일 뿐….
가끔은 집에서 다음과 같은 아버지 말씀도 없진 않았다.
안병갑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던 어느 날 수업시간이 생각난다. 선생님이 칠판에다 '女'자를 근사하게 써놓으시곤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문득 그 시절 즐겨 쓰던 '계집 女'자(字)를 떠올리며 아내를 생각해본다. 처음 아내는 멋있는 '계집 女'였다. 지금은 좌우로 퍼진 몸이 되었지만…. 필체는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반면 마누라는 좌우로 퍼져만 가는 것인가?
안병갑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우리 중학교 동창 중 장영미 황영미 오창순 이기자 이지용 같은 인물들의 배우자는 '계집 女'자(字)를 근사하게 쓰는 필체일 것이다. 반면 임종례 이경자 이명숙 같은 동창들의 배우자들은 '계집 女'자(字) 하나 제대로 못쓰는 악필일 듯….
지금도 여전히 창 밖 은수원사시나무 군락엔 바람이 분다. 혹시 저 나무가 묘목 시절 우리 중학교 실습장서 옮겨와 심어진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자니 제자들 앞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가르치시던 안병갑 선생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뵙고 싶은 먼 옛날 고향의 스승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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