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고향 생각

고향별곡

펜과잉크 2007. 5. 23. 16:52

 

 

봄이 아니라 여름을 연상케 하는 날씨다. 연일 후줄근한 기온에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솟는다. 기상청 예보에 따르면 금년 더위가 유례 없이 길게 이어질 거라 한다. 문득 한여름 더위에 들판에서 일하고 있을 고향 어른들 모습이 떠오른다.

 

누구는 밭두둑에 엎드려 풀을 뽑고, 누구는 산 밑 감자밭 풀을 뽑고, 누구는 두렁콩 잡초를 베느라 논두렁에 붙어있고, 또 누구는 논바닥 한가운데에 들어가 뜸부기 쫓으며 비료 뿌리는 모습 같은 것들이 그려진다. 그러는 천지사방에 매미는 왜 그리 울어 쌌는가? 왕매미 울음소리엔 귓창이 마주창 날 지경이다.

 

우리 회원 중 '샘안집'이란 닉네임을 쓰는 분이 있는데, 내 추정엔 아마 중뜸 이준구 선배나 이범구 후배가 아닐까 추정이 된다. 그들은 형제지간으로 큰형 이정구씨가 현직 이장으로서, 옛부터 그 집을 '샘안집'이라 불렀으니 아마도 그 집 출신 누군가 이 까페에 가입하여 정한 닉이 아닐까 여겨지는 것이다.

 

샘안집 얘기를 하자면, 일단 그 집 범구 어머니는 키가 크셔서 훤칠했고 성격도 호탕하셨다. 내가 어려서 중뜸 큰집에 가노라면 곧잘 손자 흥복이를 업고 초입 팽나무 아래를 왔다 갔다 하셨다.
"안녕하셔유? 준구 있어유?"
인사드리면
인사를 잘 받으시면서 꼭 짚고 가는 게 있었다.
"준구가 너보다 형이여. 준구 있어유가 뭐여. 형이라구 허야지."
그러셨다.
그때마다 난 '예에' 해놓고 다음에 또 뵈면
"안녕하셔유? 준구 있어유?"
했다.

 

그 분은 생전에 보따리 장수를 하셨는데 일본말로 이른바 '시보리' 장사를 하셨다. 은산장은 물론이고, 내 추정엔 아마 부여장부터 임천장 홍산장 논티장 규암장 석성장 외산장까지 두루 섭렵하고 다니셨을 줄 믿는다. 그렇게 하여 범구네는 수렁들 논을 사고, 욕골 논을 사고, 맏이 정구 형님 장가를 들고…. 에, 또 음지골 밭 평수도 늘리고….

 

당시 범구 어머니가 나눠주시는 시보리, 그러니까 홀치기감은 동네 아낙들의 농한기 주요 일감이어서 골안터(구렁터) 종오네, 복순이네, 욕골 소재 누님, 반칭이 택순이 누님, 병재 누나, 우리 어머니, 중뜸 마을 병문이 엄니, 윤구 누나, 규일이 엄니, 규일이 동생 수옥이, 재식이 엄니, 창순이 엄니, 사기점골 영남이 할머니, 병목안 구씨 아주머니네 모녀, 박승식 씨 사모님, 종택이 형님 형수, 기영이 누나 등등…. 아무튼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사람들이 겨울 한 철을 홀치기로 분주히 보냈다. 그리하여 홀치기 대금으로 받은 돈으로 부여 읍내 금성극장 하춘화, 이수미 같은 사람들 쇼 구경도 가고, 판탈롱 바지도 좀 사고….

 

'시보리'는 문양의 난이도와 크기에 따라 그 삯도 달랐다. 간단한 것들은 우리 남자애들도 옭을 수 있을 정도였지만 점점 복잡해지면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완전히 어렵게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러니까 그 홀치기라는 것이 뜨는 사람 임의로 우등감이 되는 게 아니어서 범구 엄니가 나중에 삯을 쳐줄 땐 다음과 같은 혹평도 없지 않았다.

 

"똘건너 응달집 재식이 엄니는 매번 실밥이 풀어지지 않게끔 옹골차게 꼭꼭 잘도 뜨는디, 중뜸 권병호 네 집이서 뜨는 것들은 실밥이 숭숭 풀어져서 내가 오디다 내놓기가 곤란허구먼. 품삯이라는 것이 말이여, 어? 어느 정도 값어치를 허야지만이 돈을 주는 사람이나 받아 가는 사람이나 보람되고 좋은 것 아녀? 대충 대충 떠놓고 제 값을 받으려는 심사는 안 좋은 것이라니께."
가령 그런 것이었다.
그러면서 한쪽 눈을 무의식적으로 찔끔거리셨다.

 

참고로, 여기서 하나 우리가 알아둘 게 있다. 중뜸 마을회관을 지나 과거에 게시판 서 있던 자리 뒤쪽에 비석(碑石)이 하나 있는데 이 비석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시부모께 효도한 며느리를 기리고자 세운 비문(碑文)인 바, 그 주인공이 범구네 집과 연관이 있다는 말을 과거에 들은 적이 있어 이 참에 언급해둔다. 이처럼 고향의 비문 하나에도 옛날 어른들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으니 후세를 사는 우리가 명심하여 자손의 도리를 지키는데 참조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자. 아무튼 그때 '샘안집' 범구 엄니는 손자 흥복이를 잘도 업고 다니셨다. 아마 아침에 한 번, 점심때 한 번, 저녁때 한 번 초입 나들이를 하지 않으셨나 하는 추측이다.

 

그때 시절, 마을 아낙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시보리'에 관해 조금 더 논해보기로 한다. 이걸 떠서 범구 엄니께 갖다가 주면 한 몫에 계산을 해주어 가령 정월 초하루 설 명절 같은 때 은산장에 나가 아이들 양말쪼가리라도 사기에 일조 하는 바가 컸다.

 

하지만 그것도 한시적이어서, '시보리문화'도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따라 점차 마을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대신 '담배 총대'라는 직함이 이장 못지 않은 끗발을 누렸다.

 

"에, 올해 종호네는 담배를 몇 단 심으실 거유? 3단유? 5단유? 1단은 3천포기이니께 5단이면은 결과적으루 1만5천포기유. 그런디 어느 가정을 볼 것 같으면 담배라구 돈이 된다니께 그저 심기만 잔뜩 심어놓고 관리를 못혀서 중간에 밭 두둑이서 다 말라 죽인다든가 건조장에서 널다가 태풍이 몰아쳐 비니루를 뿌리까지 다 뽑아가도, 씨발 꺼, 내 일이 아니라는 듯이 사는 심보들이어서 당최 이 마을 담배 총대로서 위신만 나빠지구 허니께 좀 확실히 심어서 확실히 공판에 내가야겄다 허는 사람들만 손들고 신고허슈. 나중에 죄다 포기수를  세어다가 면사무소에 신고허야 허니께 그때 걸려 갖고 동네 망신 시키지 말구 확실헌 사람들만 확실히 신고허셔유."
그렇게 변해갔다.

 

담배는 한 포기를 심으면 백 번, 천 번 손이 가는 작물이라 공판이 있기까지 무수한 손길이 요구되었다. 그리하여 '시보리'는 점차 과거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홀치기틀을 어깨에 걸고 똘 건너 응달집에서 논두렁길 걸어 병문네 집으로 마실 오는 일도 없어지게 되었다.
"돈이 되는 건 오직 담배 뿐이라니께. 이것저것 다 필요 없고 오직 담배만이 우리 인생이여."
마을 사람들의 철학이었다.

 

오월도 저물어 유월이 모레인데 날씨는 입하를 넘어 초복으로 치닫는다. 이렇게 더워져만 가는 날의 나른함에 묻혀 있으니 아련히 떠오르는 고향에서의 장면 하나가 또 있다. 그 얘기를 끝으로 필을 놓는다.

 

욕골 병천네 집 앞 다리 밑에 중뜸 광순이 형네 논이 있었는데, 그 집 광순이 형은 어려서부터 오직 일만 하였다. 하루는 머슴들까지 장에 나가 수박 파티를 한다는 백중 장날인데 온 들판에 광순이 형 혼자만이 논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오후 무렵, 어린 내가 어디를 가던 중에 그 논 옆 한길을 걷는데 마침 백중장을 다녀오던 창순이 아버지께서 논 아래를 내려다보시며
"아이고, 온 동네 사람들 다 장에 나갔는데 우리 광순이만 혼자 일을 허구 있네."
하시는 것이었다.
그 말이 끝나자 논에서 다리 걷고 일 하던 광순이 형이 눈물을 흘리는데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닭똥 같은 눈물이 금새 못자리 논바닥으로 텀벙텀벙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또 창순이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우지 마라. 광순아. 우지 마라. 허벅지 거머리부텀 떼거라. 그럼 다음…, 내년 백중…. 장…날엔 나하구라도 하냥 장에 다녀…오…자구나."
당신도 목이 메어 말을 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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