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이 생각 저 생각

북한산 낙뢰 사고를 보고

펜과잉크 2007. 7. 30. 22:12

 

 

 

군 시절, 녹음기(綠陰期) 및 동한기 각 4주씩 최전방 지원 근무를 가곤 했던 기억이 난다. 여름은 더위 때문에, 겨울은 추위 때문에 힘든 생활이었다. 여름밤의 산모기는 왜 그리도 따갑게 물어오던지…. DMZ에서 야간 매복을 서면 바지 밑단과 군화목이 만나 드러나는 부위엔 온통 모기 자국이었다. 원래 숲에 사는 모기는 수컷이 주종인데 이들은 대개 수액(樹液)을 빨아먹고 산다고 한다. 대신 암컷들은 민가 주변에 기생하며 동물이나 인체의 혈액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많은 모기들이 반드시 성비(性比) 따로 상존하진 않을 테니 사람에게 오는 모기를 암수로 구분 짓는다는 건 신빙성이 결여된다는 주장이다.

 

80년대 상황을 토대로 최전방 GOP 초소는 철책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도열해있다. 매 초소마다 2인씩 투입되는 게 원칙이나 병력 수급 문제로 완벽을 기하기 힘들어 통례적으로 하나씩 혹은 두 개씩 건너뛰면서 초병(哨兵)을 배치한다. 그러니 어느 초소든 두 명 모두 잠들면 초소 간격이 100미터 이상 벌어지는 셈이고 이런 와중에선 간첩이든 노루든 마음만 먹으면 침입할 수 있다. 산악지형의 100미터는 평지와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폭우가 쏟아질 때 초소에 있으면 번개가 번쩍번쩍하며 지척을 흔드는 천둥소리가 들려온다. 난 벼락치는 걸 아주 무서워해서 이 때만은 완전히 두려운 표정이 되었다. 속으로 '하느님, 제발 벼락 좀 치지 않게 해주세요. 전 지금 고지 초소에 있습니다. 미치겠습니다.' 하면서 애원했다. 고지의 초소에 벼락이 떨어지는 날엔 초병의 신세도 별 수 없을 노릇이었다.

 

현지 병사들은 낙뢰가 떨어지는 날이면 GOP 철책 너머 불모지(不毛地)에 설치한 크레모아가 폭발하곤 한다는 말을 하였는데 실제로 2년 간 하절기 도합 8주를 체류하면서 낙뢰로 인한 크레모아 폭발을 두 번 겪었다. 물론 인근에서 발생한 폭발이었지만 그 위력은 가공할 정도여서 전방의 지형지물(나뭇가지 등)이 훤히 날아가고, 후폭풍으로 불모지가 움푹 패이곤 하였다. 아마도 크레모아가 전극의 음양을 조합시켜 폭발시키는 특성 때문일 것이었다.

 

야영지에서 훈련을 하면서 숙영할 땐 뻥 뚫린 들판보다는 산 밑 와지선 혹은 개활지를 활용하였는데 이때도 안전조치에 대한 교양은 필수였다. 그 중 잊을 수 없는 게 낙뢰에 대한 대처요령이었다. 그리하여 높은 나무 밑이나 되똥한 지형엔 텐트를 치지 못하게 했다. 또한 번개가 치는 날은 통신 계통의 모든 시스템을 끄도록 지시했다. 그리하여 P-77 무전기를 끄고 안테나도 뽑아 땅에 뉘어 놓았다.

 

P-77 기종은 8-12km권 교신이 가능하다 했지만 강원도 난곡(亂谷) 지역에선 앞산 너머 전우들과의 교신조차 자유롭지 못했다. 그럴 경우 P-77 대신 다이폴 안테나를 설치하여 교신을 시도했다. 다이폴 안테나는 빨랫줄처럼 수평으로 설치하여 정 중앙에서 도착점을 찾아 쓰는 AM 방식이었다. P-77이 FM 전파 방식이어서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다이폴 시스템은 AM 전파로 험한 지형에서도 교신이 가능했다. 전파가 지형의 굴곡을 타는 특성 때문이었다. 다이폴 방식은 월남전 때 부산에서 월남까지 교신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원거리 송신이 가능했다. 부산에서 월남까지 교신했다는 부분에서 과장된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지만….

 

예를 들어 탁 트인 골프장 필드 같은 데에선 골프채를 들고 있는 사람이 번개를 흡수하는 피뢰침 역할을 한다고 보면 이해가 쉽다. 비근한 예로 금목걸이 걸고 있다가 벼락 맞아 죽은 몇 년 전 어느 남자의 비극을 회상해보자. 그런 것이다. 또 있다. 들판에서 일하던 농부들이 낙뢰를 동반한 소나기를 피해 팔각정 모양의 원두막으로 피했다가 벼락을 맞고 몰사한 사건도 기억나지 않는가?

 

들판에 있는 팔각형 콘크리트 원두막은 막(幕)이라는 표현보다는 완전한 건축물로 보는 게 타당하다. 들판이라는 특성을 고려하여 지붕 한가운데에 피뢰침을 설치해야 옳다. 그리하여 지면으로 접지를 연결해놓는 것이다. 이런 장치를 해놓는다면 몰사 당하는 비극은 없을지도 모른다. 대기가 우기(雨氣)로 눅눅한 상황이라면 전류 흐름이 인체에까지 미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일순 수 십만 혹은 수 백만 볼트가 작렬하는 상황에선 그 권역(圈域)이 상당했을 가능성도 있다.

 

1980년대 초, 정확히 말해 1983년 여름은 각 대원들에게 실탄 5백발과 세열 수류탄 네 발씩 수급 받아 군장 속에 넣고 다녔는데, 한 번은 12사단(을지부대) 섹타인 향로봉 능선 군사도로를 행군하다가 번개를 만나 '이 되똥한 도로에서 누구든 벼락을 맞는 날엔 전부 몰사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심장이 떨렸다.

 

무슨 뜻이냐 하면 1982년 2월 중순, 전두환 대통령 경호 목적으로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로 가던 특전사 대원들의 수송기가 한라산 중턱으로 추락했을 때 상황을 떠올리면 간단하다. 사체 수습이 온통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대원들 군장마다 수류탄 3-4개씩 들어 있는 상황에서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수많은 연쇄 폭발로 모든 게 절망으로 변했다는 전언이다. 험난한 산악 도로를 행군하는 대열로 낙뢰가 꽂힌다면 그 후는 안 봐도 뻔하다.

 

어제 북한산 고봉에 낙뢰가 떨어져 5명이 사망하고 수 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이다. 그 소식을 듣다가 문득 사람들이 안전불감증이 심각한 지경에 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번개 형태가 벼락의 위험이 높은 형태라면 -세로로 꽂히는 번개는 상당히 위험하다- 일시적으로 낮은 데로 대피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여기 저기서 번개가 꽂히는 상황임에도 산꼭대기서 태연 자작한다면 위험을 자초하는 꼴이다. 요즘 사람들 몸에 금속성 하나 안 붙인 사람이 누가 있는가. 더구나 그곳은 난코스로 정상까지 쇠줄이 설치되어 희생이 더했다는 보도이다.

 

그나저나 요즘은 왜 그리 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지…. 인터넷 까페를 통해 이루어진 각종 모임의 회원들이나 산악회, 동창, 향우회 같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분야가 산행이다. 산에 오르면서 이끌고 밀어주며 우정을 쌓고, 김밥 같은 단촐한 식사로 추억을 생산하는 삶…. 추억의 생산도 좋지만 부디 목숨 잃는 불상사로부터 안전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