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고향 생각

인간사 새옹마

펜과잉크 2007. 9. 30. 13:58

 

 

 

변방 사는 늙은이 이야기로 시작되는 '새옹지마' 는 원래 '眠 - 인간만사새옹마추침헌중청우면'에서 비롯된다. 나 역시 '어조사 之'를 생략하였다. 서두에 '인간사 새옹마'가 생각난 것은 이 글이 반드시 제목과 맞진 않더라도 인간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고향 은산면에 신대리라는 지명이 있다. 그 동네에 개인택시 운수업에 종사하는 유영태란 옹(翁)이 사신단다. 그 분이 은산 장날 둔터골 마을로 가는 손님들을 태우면 곧잘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주곤 했다는 것이다. 바로 큰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다.

"그 동네 류광희가 나랑 국민학교 동창이오. 광희는 외갓집이 부자라서 도시락 가득 쌀밥 누룽지를 가져오는 날이 많았습니다. 여럿이 나눠 먹었지요. 광희한테 누룽지께나 얻어 먹었습지요."

 

큰아버지와 아버지의 외갓집, 할머니 친정은 다름 아닌 협우 형님 집안이다. 협우 형님 할아버지 되시는 분이 할머니 남동생이시다. 옆집에 살던 이충훈 어르신과 중뜸 경자네 집터의 경구 작은 집이 전부 할머니 혈족이시다. 큰집과 이웃인 우리 2년 선배 이완구 님도 나로선 '아주머니' 뻘이다. 말하자면 할아버지는 청양군 청남면 청소리에서 데릴사위로 우리 고향에 장가 오시어 정착하신 것이다. 내 추측엔 아마 병목안 류(柳) 가 집안 어른의 중매로 인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

 

언젠가 말했듯이 협우 형님의 할머니는 -지금부터는 '태우 할머니'라고 표기함- '안산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셨다 한다. 병목안 안산 일대가 모두 태우네 소유였는데 누구든지 그 산에서 나무를 하다 걸리는 날엔 그야말로 '호랑이 밥'이 되었다는 데에서 비롯된 별명이라 한다. 그 분에 대한 평은 대체적으로 좋지가 않다. 시어머니께서 아랫마을 사는 딸(내 할머니)에게 먹을 거라도 들고 나설라치면 저수지께까지 쫓아와 빼앗아 되돌아갔다는 후문이 있다. 

 

병목안 마을 기청이 할머니(집안 할머니), 철구 어른 모친(인척 할머니), 기백이 형님 모친(친척 아주머니), 협우 할머니 네 분이 살아계실 적엔 동네가 조용할 날이 드물었다 한다. 넷이 서로 이간질을 하여 이틀이 멀다하고 싸우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두 보통 분들이 아니셨던 것 같다.

  

내 나이 청소년 시절에 태우네 집에 머슴이 있었는데 그 분이 바로 과거 순용 형님 고향집터에 살던 구기순, 구기서 아버지이셨다. 사람들은 그 분을 '구씨'라고 불렀다. 처음엔 기서 아버지 혼자 마을에 들어와 머슴을 살다가 훗날 순용 형님 고향집이 비워지면서 가족 모두 이사를 와서 살게 되었다.

 

머슴살이 목숨에겐 연중 딱 세 번 휴일이 있을 뿐이다. 구정과 백중 장날과 추석이었다. 그 분이 추석 전날까지 바작 가득 소 꼴로 벤 풀짐를 져 나르던 기억이 아직도 내겐 남아 있다. 물빠진 군복 바지를 입고 안장다리 걸음으로 걸었던 그 분... 그렇게 종일토록 일하고 어둠이 내릴 무렵, 평소와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은산쪽으로 걸어 나가셨던 것이다. 태우 할머니로부터 얼마의 추석 보너스(?)도 받았겠지만...

"마님, 고맙습니다. 이 돈으로 식구들 고기 사다 먹일게유."

"그려. 추석날 과음하지 말고 일찍 오게."

 

한 집안의 흥망은 3대(代)를 잇기 힘들다는 말이 있다. 부자도 가난뱅이도 3대가 이어지는 동안 언제 상황이 바뀔지 모른다는 뜻이다. 아무튼 3대까지 이르기 전에 태우네 집안은 몰락하고 말았다. 태우 할아버지는 단명하셨고, 태우 아버지는 공무원 재직 중 목욕탕에서 심장마비사 하셨으며, 장남 원우 형님은 대전에서 교직에 있으되 고향의 대소사에 한 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는단다. 또한 협우 형님은 그동안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하여 -노름에도 빠진 적이 있지만- 뭐 하나 되는 게 없었다.

 

수렁들 논에 거대한 비닐하우스를 지었지만 대부분 정부 융자에 의존하였고, 그런 해엔 꼭 태풍이 불거나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몇 년 전 폭설에도 협우 형님 소유 비닐 하우스만 두 동이 폭싹 내려앉았다. 그 뿐인가? 그 집안 출가 외인의 자손은 자살을 하였고, 그 아비도 충격을 받아 자살을 결행해버렸다.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우리 일 년 후배인 태우는 보훈 가족으로 가산점 혜택을 받아 공직에 채용되었다가 가정폭력이 상부까지 보고되어 사직 당했다. 태우는 공직에서 면직되어 다른 직업을 찾게 되었는데 그 직업이 바로 도로공사 현장 부서직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부서장은 구기서였다. 자세한 내막까진 모르지만 도로공사 입사 후 진작부터 그곳에 근무하고 있는 기서에게 어떤 도움을 청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하여 기서가 태우를 자기 부서로 끌어들였으리라.

 

구기서가 누구인가?  그는 바로 과거 태우네 집 머슴의 아들이다. 머슴을 거느렸던 집안 후손이 그 머슴의 자손 밑에서 '머슴'으로 일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인간사는 언제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명절 날, 어디선가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 나이 어린 사람으로부터 보너스를 받고... 

"자네, 고맙네. 이 돈으로 식구들 고기 사다가 먹여야겠네."

"그려유. 추석날 과음 말고 일찍 오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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