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서울 회기동에 있습니다. 10월 내내 이곳에 있을 것입니다. 인사동과 회기동은 1980년대 중반 제 일상의 지정 코스였지요. 그래서인지 지금도 각별하게 다가오는 지명들입니다.
10월 내내 일과 후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중랑천변을 산책하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걸로 스케줄을 짰습니다. 한 번은 중랑천을 거닐며 피스로 입술 연습을 하자 지나치는 분들이 되돌아보기도 하더군요.
그런데 서울에 있으니 낙원상가에 들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10월 1일부터 지금까지 벌써 세 번을 들렀네요. 어제도 낙원상가에 들러 몇 군데 사장님과 얘기를 나눴지요. 여전히 색소폰에 대한 열정이 뜨거움을 느꼈는데 어느 매장에선 지긋한 연세의 손님 몇 분이 태너 색소폰을 시연하고 계시더군요. 아마 구입 목적으로 오신 것 같았습니다.
낙원상가의 특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시되어 있는 악기들이 대체로 색소폰나라 사이트에 나오는 매물에 비해 비싼 편이었습니다. 물론 개중엔 외관이 깨끗한 악기들이 있었습니다만…. 구운 듯한 셀마 발란시드 알토 3만 번대 가격이 750만원인 걸 보면서 빈티지 모델의 가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봤습니다. 상태가 아주 좋더군요.
낙원상가를 나와 현음악기 매장 옆 골목을 통해 종로3가역으로 가는 길로 돌아 나오자 건너편 시사영어학원의 거대한 불빛과 마주쳤습니다. 거기서 지하도를 건너 종로4가 방향으로 걸으니 김승욱 님 사무실이 있더군요. 사무실은 불이 꺼져 있었습니다. 아마 위층 연구실(?)에서 또 다른 음(音)의 세계를 연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줄곧 세운상가 쪽으로 걸었습니다. 문득 인도를 오가는 사람들 모습에서 서울에서만이 볼 수 있는 색다른 문화적 요소들이 눈에 띠기도 했습니다. 그쪽엔 대형 레코드 가게들이 있어「서울레코드」에 들어가 색소폰과 트럼펫 연주 CD 코너를 구경했습니다. 색소폰 연주집이 상당히 많더군요. 옛날에 녹음된 생생한 음향의 -가공되지 않은- CD 몇 장을 샀습니다. 가격도 싸고 소장 가치도 높은 것들로 말입니다. 요즘 녹음은 전적으로 디지털 방식에 의존하지만 과거엔 파트별 아티스트들이 직접 참여 했잖습니까?
종로4가 시계방 골목에 들러 늦게까지 작업 중인 낯익은 수리점에 40년 넘은 아나로그 손목시계 점검을 맡기고 천천히 걸어 종로5가에서 전철로 회기동으로 왔습니다. 그래 오늘도 일과 후 종로에 나가야 합니다. 시계를 찾으러 말입니다. 오늘 나가면 어제 본 레코드 가게에 들러 황천수 선생님의 음반을 구해볼까 합니다. 그쪽 레코드점엔 과거와 현재의 시공을 뛰어넘는 방대한 자료들로 가득했습니다.
어제,
낙원상가를 나와「신향악기」골목 안의 중국요리 집에 들러 ‘옛날 자장면 주세요’ 했더니 3분도 안되어 기계로 뽑은 자장면을 내주는데 면발이 굳어 통 맛이 나지 않았습니다. 배추김치도 누가 남긴 잔량에다 덮어 가미한 듯한 표시가 역력했고요. 단무지와 양파로만 곁들이며 그릇을 비우고 값을 물으니 3,000원을 부르더군요. 그제야 그쪽이 노인들의 정서가 배어 있는 골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음악기」에서 종로3가역 쪽으로 뻗은 골목의 야경 속을 걸으면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속으로 온 게 아닌가 하는 상상을 했습니다. 고소한 엽차가 나올 법한 다방과 멋진 외모의 바텐더가 반길 것 같은 스탠드 바 간판 불이 밝았습니다. 일과 시간이 끝났다면서 손사래를 치는 구두닦이도 여전했습니다. 종로3가 전철역 계단의 닳고 닳은 풍경들도 말입니다. 오늘은 또 어떤 신기한 것들이 종로 거리에서 저와 마주칠까요? 기대와 설렘이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