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이 생각 저 생각

전기면도기

펜과잉크 2007. 11. 14. 15:58

 

자주 면도할 만큼 털이 많은 몸이 아니지만 면도기를 써야 할 일이 있으면 꼭 일회용 면도기를 사용한다. 일회용이라지만 전용으로 아껴 쓰면 열흘 내지 한 달도 쓸 수 있다.

 

과거 외제 고급 전기면도기를 선물 받아 쓰면서 한 가지 의구심에 맞물린 적이 있다. 과연 전기면도기로 깎이는 털은 모두 면도기 안으로 흡수되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그래 한 번은 일부러 시험해보기로 하고 흰 가운을 입고 거울 앞에서 전기면도기로 털을 깎았다. 그런 다음 가운을 거울에 비쳐보니 예상했던 결과가 나왔다. 하얀 가운에 미세한 잔해들이 수없이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언젠가 어느 분의 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여름철이라 에어컨에 선풍기까지 틀어놓은 그 분은 친분이 있는 내가 들어서는 상황에서도 전기면도기로 턱과 볼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불결해보였고 불쾌한 장면이었다. 그의 미세한 분자들이 선풍기 바람에 날려 호흡기를 타고 내 몸 속으로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 글을 읽는 남성 중에서 전기면도기를 애용하는 분이 있다면 한 번 시험해보기 바란다. 무수히 많은 분자들이 전기면도기 날에 잘려 허공에 풍산하는 결과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아까 차를 운전하면서 신호등에 정차한 옆 차 운전수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열심히 전기면도기를 문지르는 걸 보았다. 웬지 그 사람이 비위생적일 거란 추측이 앞섰다.

 

뭐 그 정도 일을 가지고 민감해 하느냐는 질타가 따를지 몰라도 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모든 거대한 결과의 시초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나니... 비근한 예로 우리 고향 어른 한 분이 암(癌)으로 사망하였는 바, 병의 시초가 밤(栗)을 줍다가 손가락 끝을 파고 든 가시로 말미암아 생긴 고름으로 악화되었다는 진단을 들어보면 결코 작다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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