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葉書)에서의 ‘葉’은 '잎‘을 뜻한다. 어릴 때 동네 글방에서 배운『한석봉 천자문』은 ’낙엽 엽‘으로 표기됐었다. ’잎‘이든 ’낙엽‘이든 간단한 서신을 보낼 때 양면 괘지 대신 집약해 쓸 수 있어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엽서는 밀봉해서 보내는 서간문에 비해 함축적이지만 그만큼 요점 위주라서 호감이 간다. 풀칠로 봉해지는 일반 편지와 질적으로 다르다는 건 아니지만 엽서엔 내면을 가감 없이 쓸 수 있다. 수식하고 망설일 공간이 없다. 본론도 말하기 힘들다.
엽서를 대할 때의 기분은 어쩌면 경건하다는 표현도 가능하리라. 만년필을 쥐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곧바로 써 내려가야 한다. 달리 비켜갈 방도가 없다. 적절한 때에 하고 싶은 말을 적어야 한다. 점점 작아지는 공간에 한 글자라도 더 심도 있게 옮겨야만 하는 것이다. 내 마음이 전달될 수 있도록….
과거엔 엽서라도 부치러 가는 마음이 설렘으로 가득했다. 엽서를 받아볼 사람의 얼굴을 그리며 우체국을 향해 갈 때의 발길은 얼마나 가벼웠던가. 우체통 앞에 서면 긴장될 때도 없지 않았다. 빨강 집체통 속으로 가볍게 떨어지는 소리가 정겹기만 했다. 막상 집어넣고도 왠지 불안하여 투입구를 꼭 확인하고 나서야 몸이 가벼워졌다. 엽서 한 장 부치기 위해 십 리 길 걸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땐 우체국 간판만 봐도 가슴이 부풀고 설렘으로 가득했다. 우체국 앞을 지나노라면 수많은 상념들이 꼬리를 물었다. 지나온 날들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회상과 희망 같은 것들로 말이다.
세월이 흘러, 요즘도 나는 엽서를 쓴다. 생각나는 사람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적는다. 그 이야기 속엔 분명히 하고 싶은 뭔가가 있다. 나는 그 뭔가를 놓치고 공연히 순백의 공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제대로 쓰고 싶다. 그러나, 과거와는 달리 엽서를 제 때 부치지 않는 우(愚)를 범한다. 여름날 쓴 엽서를 가을에 부치기도 한다. 퇴근길에 우체국 앞을 지나면서도 잊어버리고, 생각난다 하더라도 차에서 내리기 싫어 그냥 지나친다.
‘내일 아침 집 근처 우체통에 넣어야지.’
하지만 촉각을 다투는 출근길에 또 어기기 일쑤다. 그런 식으로 며칠을 보낸다. 이제 엽서는 시기를 놓친 채 서랍 속에 넣어진다. 다음에 쓸 엽서와 함께 보내기로 하고 말이다. 그런 식으로 하여 보낸 엽서가 꽤 많다. 때문에 내 엽서를 받는 이는 오래 전에 쓴 것까지 한꺼번에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종미(終尾)에 날짜와 시간까지 적는 지라, 가령 시일이 꽤 경과된 엽서에선 지난 여름의 땀 남새까지 전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럴 리 없겠지만, 하얀 지면에 세월의 질곡이라든가 일상의 소소한 변화까지도 담을 수 있다면 가을에 여름 분위기를, 혹은 겨울에 가을의 귀뚜라미 소리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여기서 간단히 피력하자면, 비록 엽서이지만 분명히 상대를 가려서 쓰게 된다. 세상의 정서라는 게 나와 같지 않기에 조심스러울 때가 있다. 달리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나로 인하여 상대방이 곤란해지는 일이 있어선 안 되는 것이다. 단순히 그 자체에만 매혹되어 전후 사정을 고려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비유가 적절할지 몰라도 언젠가 지인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취기 돋은 사람이 식당에 설치된 음향기기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는데, 그는 자신의 기분에만 심취할 뿐, 다른 식탁에서 식사를 즐기는 손님들의 입장은 전혀 살피지 않는 눈치였다. 결국 주인의 제지를 넘어 손님들의 면박을 당하고서야 조용해졌다.
문득 먼 옛날, 군대에서 즐겨 부르던 한 소절이 떠오른다. 저마다 가슴속에 오매불망 고향과 부모형제와 연인을 끌어안고 살던 시절의 애창곡….
고향으로 달려가는
눈물의 완행열차야
꿈 실은 내무반
달빛 젖은 밤아
언제나 집에 가요
집에를 가요
그리운 선옥이에게로
편지야 자리자리(잘) 가거라
엽서는 아주 잘 가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