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이 생각 저 생각

커피타임

펜과잉크 2007. 12. 13. 12:36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나온 일년을 돌이켜보니 이런저런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나의 지난 일년은 어떠했던가? 딱히 얻은 건 없어도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조용히 지냈으니 그 또한 결실이라면 결실 아닐까 자위해본다. 아침마다 집을 나와 밤이 되어 귀가하는 삶이지만 올 한 해도 나름대로 정도를 걷지 않았나 하는 진단을 내린다.


지난 10월,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서 4주 합숙 교육을 받았다. 연수생 중엔 인천공항 소속 법무부 직원도 있었는데, 고향 선배 중 그곳에 근무하시는 분이 있어 그 분 존함을 꺼냈더니 대번에 ‘아~’하며 아는 것이었다. 그래 세상이 넓고도 좁다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했고, 행여 그가 직장으로 돌아가 고향 선배와 복도에서 자판기 커피라도 나누게 되어 나에 대해 달리 얘기하는 일이 없도록 매사 조심하는 쪽이었다. 교육 점수 500점 만점에 477점을 받아 상위권을 유지했지만 사람을 객관적인 요소만 가지고 평가하지 않으니 외적인 요소도 무시할 수 없는 게 세상살이인 것이다.


나는 4층 3호실 생활관에서 생활했다. 방마다 6명이 배정되었으나 공간이 넓어 생활하기 어려운 점은 없었다. 특히 목욕탕 시설이 완비되어 조석으로 지하로 내려가 피로를 풀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었다. 우리 방 6명 중엔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 직원 김영환 박사가 함께 썼는데, 집이 수원인 점으로 합숙을 신청했다가 통근을 하는지라 다섯 명이 쓰는 셈이었다. 그 중 부산과 울주에서 올라온 직원이 승진 공부를 하는 몸이어서 학과시간이 종료되는 순간부터 도서관에 틀어박혀 새벽 한 시가 넘어서야 생활관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또 한 명은 원주에서 온 공군 수사관이었는데 준위로 갓 승진한 상태라 여유가 있었고, 아무튼 나와 홍성에서 올라온 임 씨 성 직원 셋이 비교적 유유자적인 몸이었다.


그런데 공군 수사관은 주로 국방부에서 온 군인 신분들과 어울려서 결국 나와 홍성의 직원 둘만 각별했다. 그는 이 년 전, 부평종합학교에서 4주 합숙교육을 받을 때 생활실을 공유했던 사이라 처음부터 막역했다. 고향이 충남 홍성이란 점도 내 정서를 자극했다. 그는 홍성군 광천읍에 사는 사람이었는데 모친을 모시고, 동물병원에 근무하는 부인과 아이 둘이랑 산다 했다. 불혹의 몸에도 방송통신대학교 국문과에 진학하여 학업에도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 글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모르지만 그와 나는 밤이면 각자 근처 주점을 배회하는 처지였다.


연수원 옆 주공아파트 단지엔 예쁘고 정감 있는 주점들이 여러 군데였다. 내가 단골로 삼은 통닭 숯불구이 집은 실내 분위기도 아늑했지만, 생맥주 500cc에 야채 사라다가 서비스로 나왔고, 통닭 바베큐 1/2마리를 시켜도 화사한 웃음으로 반기는 곳이라 여간 편하지가 않았다. 그렇게 시켜 먹으면 내 주량에 맥주가 조금 남았다. 돈으로 따져도 11,000원이었다. 기분 좋게 마시고 연수원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우면 세상 시름이 싹 가시는 것이었다.


늘 그렇듯이, 술은 여럿이 마시는 게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는 나는 주로 혼자 주점에 앉아 있는 신세였다. 생맥주를 홀짝거리며 이런저런 단상에 빠졌고, 그것은 또한 즐거웠으며, 혼자 상념을 즐기노라면 일상의 대안 같은 것들이 묘안처럼 떠오르곤 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그리우면 전화를 걸었다.

“임형, 나 통닭 숯불구이 집에 있습니다. 이리 와요.”


가끔 휘경여고 앞에서 버스를 타고 신답사거리에 있는 이기동 선생의 스튜디오를 찾아가기도 했다. 신답역 4번 출구에서 지척이었으므로 시간적인 부담이 없었다. 이기동 선생은 실용음악을 전공했지만 특히 트럼펫에 학문이 깊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요즘은 눈에 띠지 않는 스텔링 실버 Bb을 자랑하곤 했는데, 트럼펫을 연주하는 그의 모습은 듣는 이를 압도하고 남을 뭔가를 내뿜고 있었다.


그는 드럼이나 일렉기타 혹은 베이스 같은 실용음악을 떠나 플륫이나 색소폰, 클라리넷 같은 순수음악 쪽에도 조예가 깊었다. 스튜디오에서 얘기하다 보면 시간이 금세 삼경을 넘기 일쑤였다. 그제야 작별을 하고 아까 그 신답역으로 나와 지하도를 건너 휘경동 방향 버스를 탔다.


어느 날은 회기역 너머로 외출을 하기도 했다. 구두 밑창도 일부러 그곳에서 갈았다. 회기역 계단을 내려가 경희대 쪽으로 조금 가면 길이 굽어지는 오른쪽 은행 앞에 수선점이 있다. 군대를 전역하고 야전잠바 한 벌을 사철 갑옷처럼 입으며 서울 거리를 헤맬 적에 구두 수선을 맡기곤 했는데 그 시절 주인이 아니어서 아쉬운 감이 일었지만, 밑창에 접착제를 바르기 전 거친 금속으로 재질을 쓱쓱 문질러 표면을 일으키는 기술은 여전했다. 구두 수선이 이루어지는 동안 일대를 여러 군데 다녔는데 외형의 틀은 이십 년 전이나 별로 다르지 않았다. 거긴 앞으로도 얼마 동안 제 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한 세월, 한 시절을 보내고 나면 그에 얽힌 사연들도 많아진다.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진다. 이제 또 얼마의 시간이 흐르면 2008년 아닌가? 새해를 맞아서도 나와 주변의 모든 이들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연하장 엽서를 사러 우체국에 가야겠다.




'雜記 > 이 생각 저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0) 2007.12.24
김철주 청장님  (0) 2007.12.13
엽서  (0) 2007.12.07
텐트 예찬  (0) 2007.11.30
반산저수지  (0) 2007.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