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이 생각 저 생각

[스크랩] 예벽두문답

펜과잉크 2008. 1. 2. 21:09


 


* 모 까페에 게재한 글입니다

 



2008년 1월 1일.

어젯밤 고향에서 올라와 집에 있는「朝鮮日報」지면을 통해 금년도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당선작 양진채 님의 작품을 읽었습니다. 소감문 사진을 보며 ‘아, 이 분이 양진채 님이구나’ 했습니다. 사실 존함은 알았지만 어느 분인지 모르고 있었거든요. 사진을 보니 한 번인가 뵌 분 같았습니다. 수상 소감에 ‘굴포문학’과 문광영 교수님에 대한 언급이 있어 ‘굴포문학’과 문 교수님이 높이 뜨시겠다 싶었습니다. 좋은 현상이지요. 특히 문광영 교수님은 오래 전부터 후학 양성과 함께 인천문단에 빛나는 업적을 남기신 분입니다. 개인적으로 허물없이 대해주셔서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고요. 김윤식 회장님도 흐뭇하시겠습니다. 제가 ‘친애하는 어버이 수령 김영승 공화국’이라 하여 문제 됐던 다움 까페「인O헌」주인장도 좋아하실 경사입니다. 


어제는 부여 고향집의 소종중(小宗中)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저희 집안은 대종중보다 소종중이 훨씬 막강(?)합니다. 재원 면에서도 압도적입니다. 직계 할아버지(친조부(故) 사촌) 두 분도 오셔서 덕담과 함께 집안의 대소지사를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중 큰할아버지께선 산수(傘壽)를 누리신 연세에도 설악산 비로봉에 올라 현지 등산객들로부터 여러 번 기념촬영 제의를 받았다 말씀하시더군요. 금강산 무슨 봉(峰)에도 올랐다 하셨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 물지게와 나무지게는 기본이고 똥지게도 여러 번 지어봤습니다. 어릴 적이라 함은 10대 시절을 말합니다. 저희 고향 출신 중 물지게․나무지게․똥지게 한 번 져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거란 추측입니다. 여기서 잠깐 똥지게 얘기 좀 하고 갈까요? 똥을 퍼내는 날은 변소간부터 밭고랑으로 이어지는 길이 온통 똥 냄새로 가득했지요. 물지게로 애용되던 양철통이 본연의 가치를 상실했을 때 임시방편 과정을 거쳐 똥지게로서의 남은 역할을 맡았습니다. 금 간 부분을 담뱃갑 은박지로 때우거나 껌으로 밀봉하여 그야말로 ‘물샐 틈’ 없도록 하고 똥을 퍼 담은 후 짚을 띄워 밭으로 가는 동안 넘쳐흐르지 않게 주의했습니다.

 

하지만 똥물이 어디 그렇습니까? 걸음과 보폭에 따라 넘쳐흐를 때가 허다했습니다. 튀어 오를 때도 있었고요. 밭고랑에다 똥통을 내려놓고 바가지로 퍼서 있는 힘 가진 껏 뿌리다 보면 가끔 죽은 쥐[鼠]도 튀어나왔습니다. 퉁퉁 불어 배때기 허연 주검 말입니다. 더없이 자연스런 거름이지요.


똥 얘기를 더 하게 되는데, 저희 집에서 절골 밭까지 똥지게를 지고 가노라면 숨이 막히고 등골이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절골이 제법 멀었거든요. 황순원 님의「소나기」에 나오는 ‘삼마장’ 거리를 능가하는 길입니다. 일반 지게처럼 마땅히 받쳐놓을 형편이 못되는 게 똥지게라는 건데, 오르막내리막이 잦은 시골 산길엔 똥통을 안전히 내려놓을 평지가 드물었습니다. 그냥 오기로 가는 수밖에 없었어요. 가끔 상공으로 비행기소리가 들리면 어떤 놈들인지 되게 팔자 좋다는 분(憤)과 부러움이 함께 일었습니다. 그래봤자 기껏 작대기 하나 쥔 무력한 시골뜨기였지만 말입니다.


할아버지 본향이 청양군 청남면인데요. 말하자면 할아버지는 처가마을로 데릴사위를 오신 셈이었습니다. 할머니 집안에서 답(畓)만 해도 30마지기 넘게 주셨다 하더군요. 그렇게 저희 고향으로 오신 할아버지는 위신 때문인지 청남면 친족들과 별로 왕래를 하시지 않았습니다. 1972년 작고하셨어요. 그 후 말씀이 적은 큰아버지와 아버지께선 부러 묻지 않는 한 청양 쪽 집안에 관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 저희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집안과 관계되는 내용들을 거의 몰랐습니다.


저희들은 어려서부터 골 안터 밭뙈기와 절골 천수답, 수렁들 논으로 내몰려 농사에 동원되었습니다. 어린이날이 어디 있습니까? 벼농사는 그만 두고라도 담배농사에 연중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담배 씨앗 파종하고, 담배 모 묘판(苗板)에 이식하고, 담배 두둑에 옮겨 심고, 담배 포기 세어 신고하고, 담배 포기 때우고, 담배 북 주고, 담배 밭 농약하고, 담배 곁순 골라주고, 담배 건조장 짓고, 담뱃잎 엮고, 담배다발 건조장에 달고, 담배다발 말리고, 담배다발 걷고, 담뱃잎 떼고, 담뱃대 뽑고, 담배 조리하고, 담배 포장하고, 담배 공판하고, 아까 같이 뒷간 퍼내는 일을 하면서 자랐습니다. 겨울철 토끼몰이는 지정된 행사였습니다. 속타로 치다보니 줄가리가 안 맞는데요. 토끼몰이 얘기도 좀 해야겠습니다.


토끼몰이는 원시 사냥 형태를 유념하여 패를 조성한 후 주로 산 말랭이에서 행대로 죽 서 있다가 누군가의 호각에 일제히 행동함과 동시에 고함을 질러 토끼를 놀라게 한 다음 간격을 좁히며 밑으로 몰아 잡는 방식인데요. 저희들은 그보다는 다른 형태를 취했습니다. 패를 이룰 것 없이 마음 맞는 두 셋이 아침나절부터 눈밭의 토끼를 추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럴 경우 최소한 몇 시간은 각오해야 했습니다. 토끼가 지쳐 눈밭에서 더 이상 도약하지 못할 때까지 쫓는 사냥이었으니까요. 점심 같은 건 아예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토끼는 노루처럼 제 길이 있어 정해진 길로만 다니지만 다급해지면 비탈 고랑과 잔솔 밑구멍, 묘 마당 같은 데를 가리지 않고 내뺍니다. 본능적으로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거지요. 가끔 다시 제 길로 접어들어 발자국을 중복시키는 통에 추격이 힘들어질 때도 있었습니다. 양지바른 땅에선 눈이 녹아 맨 땅의 족흔(足痕)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어쨌거나 산골 삶에서 익힌 노하우로 발자국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토끼가 지쳐 눈밭에서 허우적거릴 때까지 쫓아갑니다.


저희 고향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충남 부여군에 속하나 지형적으로는 청양군 산세에 속해 있습니다. 칠갑산 줄기를 타고 동서 방향으로 백제광복군이 암약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령리(羅嶺里) 준령이 저희 고향 뒷산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줄기는 계속 성주산까지 이어지지요. 그래 겨울은 춥고 눈이 많으며 민가까지 마실 오는 짐승들도 자주 눈에 띱니다. 남의 집 추녀 밑에서 시래기다발을 뜯고 있는 송아지를 노루로 알고 작대기 들고 뛰어 가다 실소한 예도 없지 않습니다. 저도 아랫집 송아지를 노루로 착각하고 달린 적이 있었거든요. 폴짝 사라진 둔덕을 넘으니 양지바른 곳에서 어미 젖통을 받는 송아지가 보이더군요. 얼른 보면 꼭 노루나 고라니 같은 게 송아지입니다.


지형이 그러니 마을 초입 고개도 험로입니다. 첫째로 각(角)이 높아요. 눈이 어지간히 내려도 차가 못 들어갑니다. 폭우로 버스가 끊어지는 일은 드물어도 눈 때문에 시내버스가 결행되는 날은 많습니다. 시내버스 노선이 없던 시절엔 방앗간 구루마가 결행을 하여 쌀을 찧어놓고도 남의 집에서 꾸어다 먹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방앗간 구루마가 들어와서 갚으면 되니까요.


위와 같은 지형 조건으로 외부 문명과 단절된 환경이었습니다. 가끔 산허리 지름길을 타던 박제호랑이 사진사나 죽제품 장수 혹은 보따리 장수가 들러가는 정도였습니다. 박제호랑이 사진사의 경우 호랑이 뱃속에 사진기 외 수류탄, 삐라, 권총, 김일성 사진 같은 게 들어있다고 신고되어 지서로 끌려가 죽도록 맞았다는 소문이 파다했고요. 간첩은 무슨 간첩입니까? 그 후로도 몇 번을 봤는데…….


아래 사진 속 중앙에 계신 할아버지가 설악산 비로봉을 오르셨다는 분이십니다. 작년에 할머니께서 작고하시어 청양 선산에 모셨지요. 그 후 지금까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자손들을 데리고 할머니 산소에 가셔서 곡(哭)을 하신다 합니다. 사위들도 전부 부르신다 하더군요. 할머니 산소에서 곡하시는 할아버지를 그려보면서 울컥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엔 설마 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나 아직 저희 고향엔 유사한 정서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서산시 성연면의 ‘시묘 살이 3년’으로 유명한 류(柳) 範字 秀字 어른도 저희 친족이십니다.

 

훗날, 제 꿈이 뭐냐 하면 김석렬 시인처럼 산턱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제겐 귀향(歸鄕)을 의미합니다. 아까 똥지게 져 나르던 절골 산자락[窪地線]에 천수답이 하나 있거든요. 그 시절, 등골을 휘게 만들었던 그 땅이 오늘에 와선 전망 좋은 집터로 바뀌어 보입니다. 천수답이라 평평하여 삽날로 건드릴 필요 없이 집만 가만히 앉히면 되는 것입니다. 으리으리한 저택이 아니라 아담한 수준의 가옥 한 채를 짓고 그 안에서 독서하며 글쓰기하면 최고의 삶이 될 거란 생각입니다.


뒷산에서 삭정이 주워 와 군불 감으로 쓰고, 밤나무 밭 고목을 썰어다가 장작 쌓아놓고, 화목 난로 훈기를 높이면서 김이 솟는 주전자에 직접 재배해 말린 둥글래 차를 우려 마시는 삶은 정말 행복할 것입니다. 그 행복은 아담한 가옥 수준으로도 충분히 누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고구마도 구워 먹으면서요.

 

앞에서 똥 얘기가 길어 비위 상하신 분은 안 계시겠지요? 그래 봤자 하루 한 번 기본으로 손이 가는 부위가 똥구멍입니다. 밤중에 샤워하면서 뒷물할 때도 건드리게 되잖아요. 우리의 인식이 문제입니다. 80년대 중반에 쓴 졸작「똥전」에 보면 ‘앞산 매운 마늘 싹도 톡톡 틔우고’라는 시어가 있는데요. 사실 세상엔 똥 내음으로 안 되는 게 없는 것 같아요. 결국 그것은 자연이고, 모든 게 인간 본연의 모토에서 출발한다, 그런 뜻입니다.

 

이제 또 한 해가 밝았습니다. 신년 벽두에 여유를 갖고 적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퇴근시간 한 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만 맺을까 해요. 아무쪼록 인천문협 여러분의 건강과 댁내 행운을 함께 기원합니다. 예년에는 연하엽서를 보내드렸습니다만 올해는 이 정도로 갈음하겠습니다. 매년 똑같이 하면 혹 ‘정치인’이 아닐까 의심하는 눈도 있을 테니까요. 제가 좋아하는 분들을 높이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 내지리 시내버스
글쓴이 : 류삿갓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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