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온통 설원입니다. 창 밖엔 여전히 눈이 나부껴요. 저희 사무실은 북향 4층이라 창 밖으로 공장지대가 주경(主境)으로 펼쳐지고 그 너머 멀찍이 연안부두까지 이어져 언뜻 TV를 통해 보는 러시아 극동 해안의 한적한 풍경들을 연상시킵니다. 인적 드문 공장가(街)로 가끔 화물 트럭이 드나들 뿐 눈 오는 날의 정지된 이미지가 회색빛 정물과도 같습니다.
그래 간헐적인 미풍으로 손짓하던 은사시나무도 지금은 정적 속에 있습니다. 이런 날 고향집에 있노라면 이웃 마을 친구 집의 따뜻한 구들이 생각났습니다. 곧 사철 갑옷인 야전잠바를 걸치고 집을 나섭니다.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걷습니다. 자욱한 눈발은 앞산 솔밭을 덮고 콩밭머리와 논길과 새들의 비상(飛翔)까지도 잠재웁니다. 그저 가끔 건너편 숲에서 눈사태 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게 전부입니다. 해송처럼 쭉 뻗은 솔가지가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뚝 부러지며 일순 석 삼태기 분량을 내리붓습니다. 동시에 갈참나무 잎들이 우수수수 아우성을 지릅니다. 그 뿐, 눈이 내릴 때의 서정은 대개 포근하게 느껴져요. 추위는 낙화의 드라마틱한 순간들이 그친 후에 찾아옵니다.
拙作
겨울 이야기
눈이 많은 날은 뒷산에서 사태 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키 큰 소나무에 얹혀있던 눈 더미가 와르르 무너져 갈참나무를 덮치곤 합니다. 잠에서 놀라 깨어난 나뭇잎들이 우수수수 아우성을 칩니다. 그러다가 숲은 뚝뚝 낙수를 시작합니다. 터진 숲으로 햇빛이 들고 처마 쪽도 낙수로 바빠집니다. 아이들은 썰매를 지치거나 언덕에서 연을 날립니다. 논두렁을 쓸어 청산가리로 위장한 팥을 놓아 까치를 유인하는 장정들도 보입니다. 정말로 까치 몇 마리가 깨끗이 쓸어놓은 논두렁에 앉습니다. 뒤따라 온 까마귀까지 비틀거립니다. 장정들이 ‘우’ 한곳으로 몰리고 연 날리던 아이들 표정이 다시 화들짝합니다. 샘 안집 바깥마당에선 매에 낚인 닭이 죽는소리를 냅니다. 날렵한 아이들 몇이 또 그쪽으로 뜁니다.
눈이 많이 온 날은 뒷산에 눈사태가 지고 갈참나무 잎이 수런대고 처마 밑에 낙숫물이 지고 아이들이 썰매를 타거나 연을 날리고 장정들이 청산가리를 놓고 날쌘 패가 매를 쫓아 눈밭을 달립니다. 그 사이 어른들은 낮잠을 자거나 안팎이 샅을 대고 더운 입김을 훅훅 내뿜습니다. 그리하여 명년 가을에 떡두꺼비 같은 목숨 하나를 더 얻습니다. 소 개 염소 오리까지 새끼를 얻어 다들 부자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