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이 생각 저 생각

선불폰

펜과잉크 2008. 1. 10. 18:39
 




가급적이면 직업 관련 얘기를 피하고 싶은데 오늘은 좀 언급할 게 있습니다. 디지털 시대의 급변하는 범죄양상에 대하여 홍보성 효과와 경각심도 심어드릴 겸 말입니다.


휴대폰 중 선불폰이라는 게 있습니다. 일명 ‘대포폰’입니다. 명의가 없는 휴대폰입니다. 주로 범죄자들이 사용하지요. 암거래로 시장성을 확보한지 오래 됐습니다. 예를 들어 사기꾼이 노숙자한테 용돈 몇 푼 쥐어준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휴대폰을 개설하여 그 휴대폰으로 다시 선불폰 업체에 전화를 걸어 요금을 선납시킨 후 퀵 서비스 등을 통해 제품을 받아 이런저런 범죄에 사용하면 추적할 길이 없습니다. 사용요금은 카드로 결재하면 끝입니다. 고유번호를 입력하면 간단하니까요.


얼마 전, 사이버 사기사건이 접수되었는데 내용인즉 인터넷에 가전제품 할인사이트를 개설한 후 수많은 네티즌들로부터 대금을 입금 받아 종적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이트 개설지가 저희 관내라서 저희 사이버팀에서 수사를 하게 됐지요. 서울 성북구 전농동을 오르내리며 며칠을 전략적으로 움직인 끝에 주범을 검거했습니다. 하지만 영장이 기각되어 불구속 상태로 수사하게 됐어요. 그래 그를 정보원으로 적극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이 참에 범죄 온상인 대포폰 업체를 소탕합시다.”

“넵!” 


일단 정보원에게 평소 거래했던 선불폰 업체에 전화를 걸어 선불폰 몇 대를 주문한 후 제품이 고장 났다는 핑계로 퀵 서비스를 통해 반품시키는 과정을 추적하여 급습하기로 했습니다. 그래 오늘 아침 장한평역 1번 출구에서 퀵 서비스를 통해 휴대폰을 받은 후 장소를 천호대교 쪽으로 옮겨 정보원에게 업체로 다시 전화를 걸어 제품의 하자를 따진 후 다른 제품으로 교환해달라고 통화하게 했습니다. 그쪽 업체에서 퀵 서비스를 통해 물건을 영등포역전 경방필백화점 앞으로 보내라는 답변이 왔습니다. 그래 신속히 영등포역전 경방필백화점으로 이동하여 전화를 걸었더니 직원 대신 퀵 서비스 배달원을 보냈더군요.

“사실 저희는 사이버수사대 형사들입니다. 도와주셔야겠어요. 반품 업체로 이동하는 동안 미행할 테니 가급적이면 신호를 지켜 천천히 운행해주세요. 물건을 건네는 순간 덮치겠습니다. 당신은 그 때 자리를 뜨면 돼요.”

저희는 그에게 이용대금+알파를 선불로 건넸습니다.


퀵 서비스 배달원이 업체에 전화 거는 걸 일일이 감시(?)하면서 체크했습니다. 퀵 서비스 배달원이 범인에게 수신처를 묻자 영등포신세계백화점 앞으로 오라는 거예요. 경방필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은 지척입니다. 신세계백화점이 세일기간이라 굉장히 혼잡했습니다. 저희들은 퀵 서비스 배달원을 인도에 대기시킨 후 각자의 위치에서 접선 순간을 노렸습니다.


그런데 약속시간이 20분가량 지나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퀵 서비스 직원이 독촉 전화를 걸자 범인은 또다시 퀵 서비스 배달원을 내보냈어요. 일이 꼬이는 걸 감지하고 새로 나온 퀵 서비스 배달원에게 그동안의 내막을 설명한 후 협조를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인도에서 체류한 시간이 채 5분가량 됐을까요?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려는 순간 정보원 휴대폰에 문자가 뜨는 겁니다.

‘너 형사들 붙였지? 씨O놈아, 다 봤다. 네 명…. 사라진다’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모든 게 수포로 끝났다는 판단이 서더군요. 힘이 쫙 빠졌습니다.


범인들은 퀵 서비스 직원과 약속한 신세계백화점 앞으로 다른 퀵 서비스 배달원을 보내 접선하는 현장을 건너편에서 확인한 후 새로운 퀵 서비스 배달원이 출발할 때까지 특별한 동향이 감지되지 않으면 다시 전화를 걸어 근처로 위치를 바꿔 물건을 인수 받을 속셈이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저희가 그들에게 제대로 당한 셈이지요. 전라로 노출되고 말았으니까요. 하지만 여기서 그들이 승리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까 서두에 장한평역 1번 출구에서 만난 퀵 서비스 배달원이 있으니까요.


그를 상대로 장한평역 1번 출구로 가져온 선불폰을 어디서 누구한테 받았는지를 알아냈으니 말입니다. 신길동 대영병원 앞 노상에서 30대 초반 여성으로부터 받았다는 제보를 확보했습니다. 그것만으로 장소를 특정 짓긴 힘들어도 범인이 업무를 의뢰할 당시 퀵 서비스 배달원과 통화한 휴대폰 번호가 있으니 이 정도면 큰 소득입니다. 번호 명의가 앞서 얘기한 대로 노숙자 같은 제3자라면 절차가 조금 복잡해지지만 종극엔 대상자를 특정 지을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아무리 완벽한 범인이라도 휴대폰 내역을 추적하면 한 번쯤 가족이나 친지들과 통화한 근거가 뜨겠지요. 어차피 저희들은 ‘서울’만 가면 돼요. 며칠 늦어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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