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1월 17일.
군대를 전역하고 사회에 첫발을 디딘 날이다. 우린 충남 병력으로 입대 동기가 꽤 될 것이나 논산훈련소에서 1박을 보낸 것 외엔 뿔뿔이 흩어져 부대 전입 동기 여섯 명만 겨우 기억할 뿐이다. 여섯 명 중 네 명은 중간에 타부대로 부적격 전출을 당하여 전역하던 날 함께 부대 정문을 나선 이는 동기 조성욱이 유일하다.
대한민국 모든 예비역들이 밤새워 늘어놓는 군대 얘기를 이 자리에서 미주알고주알 꿰기는 싫고, 우리 부대 출신들도 북파공작원(HID)들처럼 종로 거리에서 LP통에 불 붙여 뒹굴려가며 목소리를 높이면 개인별 5천만 원은 능히 나오지 않을까 추산해보는 바이다.
동마장터미널에 도착하여 성욱이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다시 만나자는 악수와 함께. 나는 공중전화부스로 다가가 신답동 사는 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린 첫사랑으로 군대 가기 전까지 내내 연애하던 사이였다. 밤이 되어 약속시간이 되자 ㄱ가 나왔다. 둘이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고 여관으로 갔다. 밤새 둘이 엎치락뒤치락 ‘돌격 앞으로’의 땀내 나는 진통을 겪으면서도 매 순간 정녕 행복했으며 다신 헤어지지 않을 거라 약속했다.
“고향 갔다가 올 거지?”
“응, 옷 갈아입고 올게.”
“언제 올 거야?”
“한 달 후에….”
“한 달 후?”
“응.”
“아까 그 신답다방 알지?”
“응.”
우린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나 고향은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든 그 산중으로 발을 헛딛는 날엔 징역 3개월은 기본이다. 도무지 외출이 허락되지 않았다. 봄여름가을겨울 삭신 휘도록 일만 하는 산중에서 바깥 외출이 무슨 팔자냐. 눈만 어지간히 와도 고개가 막혀 거마는커녕 사람 하나 얼씬하지 못하는 산중마을에서 말이다. 막걸리집도, 성냥 비누를 파는 집도 없었다. 전화도 없었다. 오죽하면 6. 25 때 피난민들이 떼로 들어와 은신했을까? 첩첩 오지가 아님에도 하찮은 도로 하나 경유하지 않는다.
한 달 후, 결국 서울로 가지 못했다. 정월대보름이 끝난 고향은 본격적인 농번기로 돌입하였다. 고향 사람들은 일찍부터 담배를 심어 예배당 다니는 집 하나를 빼곤 전부 밭고랑에 붙어살았다. 콩 한 포기 꽂을 자리까지 담배를 심는 징그러운 마을이었다. 담배가 보통 농사인가. 살을 태우는 폭염의 날씨에도 밭고랑에 웅크리고 앉아 열심히 잎을 따나가야 하는 천형(天刑)과도 같은 고역이 담배농사라는 거다. 따고 따도 끝이 없는 게 담뱃잎이다. 우리 집은 5단정을 심어 정부에 공식으로 신고해놓은 것만 1만5천 포기였다. 대규모 엽연초 재배 농가였다.
전년도에 학력고사를 치르지 못한 나는 그 해를 또 재수해야 할 형편이었다. 무력한 청춘은 농사를 권장하는 집안 어른들과 공부를 주장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시름 앓을 뿐이었다. 마음은 온통 그녀에게 있음에도 현실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어머니의 도움으로 고향을 빠져나온 게 그 해 오월이다. 그녀를 찾아갈 명목도 위신도 없었다. 기력도 없었다. 한 집안의 맏이가 꼴이 아니었다.
성욱이에게 전화를 거니 서강대 사학과에 복학해 있었다. 모든 게 늦었다고 판단하고 그를 만나 인사동 고옥촌으로 걸음을 옮겼다. 당시 성욱이 아버님이 대한체육회 임원이셨고 매형이 육사 출신의 부대장이었으며 큰 형이 운수업체를 운영하여 딴판인 형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인사동과 신답동이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있음에도 그땐 왜 그리도 멀었던가. 끝내 그녀를 찾아가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우리 나이 이제 마흔 여덟이다. 지명이 내일 모레인 것이다. 아,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되어….
재작년,
아주 오랜만에 한 통의 전화를 걸었다. 이제는 대전에 살고 있는, 신답다방에서 만나기로 했던 그녀였다. 목소리만이라고 듣고 싶었다. 그녀는 조금 떨리는 톤이었지만 대체로 원만히 통화했던 것 같다.
“결혼 했지?”
“응.”
“애들도 크고?”
“응.”
“그때 못 가서 미안해.”
“…….”
“신답다방!”
“…….”
“미안해.”
“보내줄 게 있어. 스웨터야. 신답다방에서 주려고 떠 둔 거…. 아직 갖고 있어. 언젠가 만나 주려고…. 한 달 동안 온 정성 들여 뜬 게 억울하고 분해서 아직까지 못 버렸어. 아무에게 못 주고 그냥 갖고만 있어.”
며칠 후 소포가 왔고, 그 안에서 목련 빛 고운 스웨터 한 벌이 나왔다. 옷을 보는 순간 지난날의 추억들이 물빛으로 쭉 펼쳐지는 것이었다. 나는 스웨터에 담긴 의미가 너무나 각별해서 한 번 거울 앞에서 입어보았을 뿐, 옷장에 고이 걸어 간직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