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내와 무슨 얘기를 나누다가 평소 준비해뒀던 말을 던졌습니다. 제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 주변 사람들을 보면 70-80%가 비정상 같아. 이혼하고 재결합했다가 다시 이혼한 사람도 있더군. 자손들이 경찰서에 출입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고…. 건전한 사람들도 많을 텐데 왜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거지?“
진작부터 준비해둔 말인데 막상 건네고 나니 아내가 아주 언짢아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도 나름대로 응수해오더군요.
“당신 고정관념이 그런 식이라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거야.”
곧 상황이 마무리 됐지만 저는 아내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없다’는 말이 뒤통수를 망치처럼 때렸거든요. 그래 혼자 이 문제를 놓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결론은 아내의 말대로 제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겐 지금 사람이 없습니다.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지나지 않아요.
냉정히 진단하건대, 제가 지금 심각한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럿이 모이는 장소엔 가고 싶지 않고, 퇴근 후엔 음악 연습실에서 연습하다가 귀가하는 스케줄로 정해져 있습니다. 연습실엔 제 개인 부스가 따로 있어 그 안에서 몇 시간 씩 음향기기를 틀어놓고 연습합니다. 인터넷 시설과 방음장치도 구비됐지요. 하루라도 거르면 정서가 불안해질 정도입니다. 밖에서 친구나 지인을 만나 술을 마셔본 게 언제인지 모릅니다. 설령 누굴 만나도 연습실 생각이 앞섭니다. 막상 연습실에 있으면 집에 갈 일만 생각합니다. 아들이 자고 있을까? 녀석은 무슨 일로 하루를 보냈을까? 오늘 밤 무슨 책을 읽을까? 무슨 음악을 들을까? 술을 마실까? 그냥 잘까? 고작 그런 고민으로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제 휴대폰엔 스펨 문자나 대출 관련 전화만 올 뿐, 개인적인 친구나 동창들의 전화가 없습니다. 전화가 와도 여러 소리 늘어놓고 싶지가 않아요. 서로 부담을 주는 통화는 아예 꺼내고 싶지도 않습니다. 남에게 돈 빌려주고 싶은 마음도 빌려 쓰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집 근처 슈퍼마켓에 100원짜리 외상 한 번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씀씀이가 검소한 편도 아닙니다. 혼자 서울 가서 이것저것 사오는 게 많습니다. 음악을 하면서도 지출되는 돈이 제법 돼요. CD 음반도 1천장이 넘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경조사 지출 또한 무시 못 합니다.
에, 처음부터 이렇진 않았습니다. 2000년 초까지만 해도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밤 외출이 잦았어요. 주안역전 2030거리에 가면 여기저기서 악수를 건네고 ‘깍두기’나 양복 스타일들이 ‘형님’ 어쩌고 하며 친근하게 다가오는 일이 숱했습니다. 그들과 어울리는 날이 많았습니다. 자신만만했고 컨디션도 탄력을 받아 능동적이었습니다. 무슨 때가 되면 사무실에서 전화 받기가 곤란할 지경이었습니다.
“어디세요?”
“어이, 종호 아우인가? 나가 지금 사무실 근처로 갈 것인디, 잠깐 얼굴 좀 볼 수 있겄는가?”
“형님, 요즘은 왜 안 보이세요?”
제가 바뀐 것은 ‘속세의 모든 부질없음과 연을 끊고 다른 길을 걷자’ 라고 다짐한 후부터였습니다. 과거 운동하던 시절로 돌아가 도복과 트레이닝복을 준비하여 틈만 나면 체육관에서 땀을 흘렸습니다. 또한 악기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고, 시간이 나면 아들 녀석과 이곳저곳을 다니는 패턴으로 바뀌었습니다. 주안역전이든 어디든 딱 끊어버렸습니다. 아울러 그쪽 전화도 일체 받지 않았어요. 하루 2갑 넘게 피우던 담배도 끊었습니다. 술도 집에서만 마시기로 다짐했고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거죠. 밤 외출을 끊으니 동창들이나 막역한 사람들의 요청조차 귀찮아졌습니다. 그래 공식적인 행사 외엔 일체 나가지 않았습니다. 근근이 이어지던 문협 회원들과의 관계도 중단됐습니다. 동인활동도 싫어졌습니다. 결국 인천문협 외엔 달리 활동하는 곳이 없습니다.
패턴이 바뀌어 돈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습니다. 가령 개인 소장품을 매매하면서 계약금으로 100만원을 받아 가방에 넣어둔 채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얼마 전 무슨 일로 가방을 뒤지면서 알게 됐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해졌습니다.
2005년에 인천지방경찰청 지하 무도관에서 공중낙법을 하던 중 어깨를 다쳐 운동을 쉬게 되었는데요. 그 때부턴 오직 퇴근 후 연습실 거쳐 집에 가는 쳇바퀴 생활입니다. 연습실에서도 별로 얘기를 나누지 않아요. 연습을 하러 간 이상 잡담이 있을 수 없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 혼자 연습과 연주만 하다가 집으로 갑니다.
결국 저는 모든 외부로부터 단절되어 저 혼자만의 격리된 삶으로 고착된 게 아닐까 의심됩니다. 사람 만나는 자체가 싫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의 요구나 편의에 맞춰 행동해야 한다는 게 거부감을 일으킵니다. 혼자 책을 읽으며 생각하거나 음악을 연주하며 상상하는 게 훨씬 행복합니다. 직장 생활을 하노라면 동호회 모임도 있기 마련인데 제 입장에선 등산 다닌답시고 몰려다니며 잔소리나 주고받는 삶이 싫습니다. 잘못된 인식관이지요. 여럿이 정보를 교환하다 보면 새 지식도 얻고 사람도 알게 되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남에게 좋은 소리도, 아쉬운 소리도 싫고, 필요 없는 도움도 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그냥 혼자가 좋아요.
스스로 변화를 시도해본 적도 없진 않습니다. 문제는 항상 저 자신입니다. 가까이 접근하려 했다가 상대방이 시큰둥하면 두 번 다시 다가가지 않습니다. 그걸로 단절입니다. 이런 제 결점을 아내를 통해 깨닫고 보니 매우 심각하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지금 분명히 대인기피증을 앓고 우울증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누구와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혼자 생각하고 고뇌하는 게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혼자 조용히 음악을 틀어놓고 음률에 매료되는 순간들을 그려보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다양한 대인관계였던 과거로 선회하고 싶지만 마음뿐입니다.
아아, 제겐 사람이 없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하나 둘씩 잊혀지고 멀어져 다들 떠났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러 사람을 사귀어 의식의 혼란만 일으키느니 이대로 혼자 조용히 사는 게 편하다는 인식입니다. 버리지 못하겠어요. 이 늪에서 헤어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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